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덤벙돈벙 May 11.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72 -새로운 변화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새벽부터 동생이 앓는 소리에 깨어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4시도 안 됐다. 상태를 확인하니 내가 자고 있을 때 또 콧줄을 빼는 사고를 쳐놨다. 간호사에게 말하니 일단 콧줄을 세척해 놓으면 아침에 넣어 주겠다고 하였다. 새벽부터 콧줄을 씻고 있으니 이게 무슨 난리인지 한숨이 나왔다.


 콧줄을 다 뺐는데 동생은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문제는 정확하게 어디가 아픈지를 알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일단 되는 대로 자세를 바꿔 왼쪽을 향하게 옆으로 눕혀 놓으니 그제야 편안해졌는지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도 다시 잠을 자려고 누었지만 동생이 신경 쓰여서 선잠을 잤다. 꿈인지 현실인지 잠꼬대를 하는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발을 툭툭 치며 나를 깨웠다. 놀라서 일어나 보니 우리 옆 자리 간병인이 다가와서 동생이 어딘가 불편한지 누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고 했다. 동생을 보니 몸에 힘을 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혹시나 자세를 바꿔주면 되는지 물었는데 고개를 끄덕거리길래 똑바로 눕혀 주었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잠이 들었다.


 새벽에 2번이나 깼더니 하루가 너무 피곤했다. 기존의 수면패턴은 저녁 10시부터 6시 반까지인데 여기는 8시가 되면 불을 끄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서 강제로 취침을 해야 했다. 병실이 너무 어두워서 보조등을 켜고 기저귀를 갈고 있었더니 입원한 할아버지가 불을 끄라고 눈치를 줘서 자리에 있는 불빛마저 꺼야 했다. 아무래도 전부 연세가 있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소등시간이 빨랐다.


 반면에 동생은 네블라이저를 하고 저녁을 먹으면 7시가 넘어가는데 바로 불을 꺼버리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저녁 8시에서 10시가 가장 인지가 또렷해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재우니깐 새벽에 자꾸만 일어났다.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기간이라는 게 있지만 새벽마다 깨버리니 나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같은 병실을 쓰는 간병인이 시끄러워서 잠을 설쳤다니, 자기는 어두워도 불을 안 키고 옷을 갈아입히는데 불을 켠다느니, 내가 들으라는 듯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감정이 더 예민해진 상태였다.


 주치의가 회진을 돌면서 문제가 없었냐고 길래 새벽에 자꾸 아파서 깬다고 이야기했다. 원래 생활하던 시간이 있는데 갑자기 이곳에 맞춰야 해서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초췌해진  모습을 보며 오늘 아침도 너무 피곤해 보인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어서 힘들 거라면서 말하길래 동생 수면패턴이 10시부터 6  사이고, 하필 8시부터 10까지가 가장 정신이 또렷해지는 시간인데 그때 불을 꺼버리니 아무것도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간호사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보조등이 있으니 그거라도 키고 생활을 하라고 말하길래 병실 전등을 소등하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는데 개인 자리에 있는 보조등을 켜는 것까지 끄라는 말이 나왔다고 털어놓았더니 병실생활을 하면 서로 조율해야 하는  맞지만 보조등까지 뭐라고 하는 것은 심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병실에 있던 한분이 우리는 늦게 소등을 하는 편이라며 8시에 끌 때도 있고 더 늦게 끌 때도 있다고 해명을 하였다. 간호사는 그래도 보조등 켜는 건 이해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바쁜데 일방적으로 맞추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니 볼멘소리로 자기들이 불을 꺼도 어차피 우리 자리는 늦게까지 보조등을 켜놓고 있더라면서 핑계를 댔다.


처음에는 호흡기 치료를 늦은 시간에 한다고 뭐라고 해서 횟수도 줄이고 시간도 변경했는데 이젠 보조등을 켜놓고 기저귀를 갈고 소변주머니를 비우는 것조차 눈치를 보게 만드니깐 짜증이 밀려왔다. 저녁만 되면 혹여나 남들이 깰까 봐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가. 아무래도 환자의 상태가 다르고 동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 해서 그런 건데도 마치 내가 남들이 잘 때 매너 없이 구는 것처럼 말이 나오니 나도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직접 얘기하기 싫으니 간호사를 통해서 불만제기를 했고 알아서 해결을 해주었다. 앞에서는 알아들었다는 듯 행동을 하지만 간호사가 나간 뒤에 험담이 오가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어차피 나에게 직접 하지 못할 말을 뒤에서 해봤자 별 타격은 없었고 건드리면 싸울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성적으로 한번 더 생각했다. 무례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하는 게 옳은 걸까, 아니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옳은 걸까. 똑같은 사람은 되기 싫고 가만히 있자니 계속 그럴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누군가가 내가 하는 간병방식에 입을 대는 것조차 싫어졌다. 가뜩이나 하루 재활 치료가 6시간이나 있어서 정신이 없는데 도움을 구하지도 않은 점들을 자꾸 충고를 해서 스트레스가 쌓였다. 필요하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발 관심도 선을 지키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싶었다.


 이렇게 간섭받는 상황이 너무 불편해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지금이 꼰대집단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아마 그분들이 보기엔 내가 되바라진 요즘 젊은이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이곳을 탈출하려면 동생이 힘을 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듯했다.  


  심지어 기존 재활 시간표에서 1시간이 더 추가가 되었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했다. 밥 먹고 돌아서면 재활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점은 재활시간을 활용하여 개인적인 일을 볼 수 있었다. 재활시간에 맞춰 마트에 들러서 장도 보고, 약국에 들러서 물품도 구매했다. 그리고 마치는 시간에 가서 동생을 다른 치료 과정 장소에 옮겨주고 나는 다시 내가 할 일을 한다. 그 사이에 침대 시트도 갈고 병실 정돈을 하였다. 교통약자 택시인 두리발 등록 신청서까지 완료했다. 예전에 듣기로 보호자는 할인 혜택이 있다고 말해준 것이 생각이 나서 물어보니 입원환자의 보호자 중 1인에 한해서 진료 할인이 된다고 하였다. 간병을 한다고 망가진 몸을 치료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근처에 있는 행정센터로 가서 서류를 발급받고 진료를 받았다.


 그냥 손목이 뻐근하고, 발목은 예전에 아킬레스가 심하게 부으면서 통증이 있었던 터라 한 번쯤은 검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대기를 하는데 동생의 재활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왔다 갔다를 몇 번이나 하다가 드디어 진료를 볼 수 있었다.


 평소에 어떤 운동을 했었냐 물어보길래 주짓수를 했었다고 하니 평소에 운동을 하던 몸이 아닌 것 같다며 오히려 뼈도 약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전형적으로 움직임이 적다가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염증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손목은 엄지에 염증이 있어서 보조기를 착용해야 된다고 했다. 아직 많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그냥 뻐근한 정도라고 했더니 그래도 웬만하면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발목에는 골절 흔적이 있다고 하면서 수술한 지 얼마 안 됐냐고 묻길래 13년 전에 했다고 말하니 웬만하면 뼈가 아물어서 다 채워지는데 아직까지 핀이 박혀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뼈에 동그라미 3개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몸속에 잔해가 많았다. 간병을 하면 또 몸을 많이 쓸 수밖에 없으니 약을 처방하고 재활도 함께 진행하면서 일주일 후에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보조기를 착용하게 되었다. 손목을 쉴 틈 없이 계속 쓰다 보니 통증이 둔해져서 불편하다는 걸 몰랐는데 손목이 아픈 게 맞는 것 같다. 아니 지금은 손목뿐 아니라 모든 관절이 전부 아프다. 어깨는 항상 결리고 목과 허리는 항상 뻐근했다. 걸을 때는 무릎에 통증도 있는데 오히려 손목보다는 무릎이 더 아파서 이건 다음 진료에 같이 봐야 할 듯하다. 그냥 지금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 살리려고 하다 둘이 죽어나게 생겼다.


저녁에는  엄마와  아빠가 면회를 왔다.  분은 동생의 상태를 보더니 곧바로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 동생을 보고 있으니 많은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아빠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들며 나에게 필요할  쓰라고  손에 쥐어주셨다. 그렇게  함께 있으니 다른 치료사가 다가와 치료실에는  1명만 상주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말을 듣고  엄마만을 놔둔   아빠와 나는 데스크로 나왔다.


 그렇게 대기실 의자에 앉아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다가 큰 아빠가 입을 열었다. 자기는 장남으로써 가난이 너무 무서워서 아직도 일을 하루라도 쉬면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갈까 봐 불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항상 악몽을 꾸는데 형제들은 자신과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아빠, 즉 막내가 사고를 치고 돌아다닐 때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 보여서 너무 미웠다고 한다.


 그렇게 말을 하지만 큰 아빠의 말에서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아우를 먼저 떠나보낸 형으로써의 착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보고 집안의 첫째라는 것과 아픈 동생이 있다는 공통점을 느껴 마음의 소리가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동생 병간호를 하느라 수고가 많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큰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까지 어떤 심경으로 살아왔는지 느껴져서 안쓰러웠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아침과는 사뭇 다른 병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병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한 태도가 약간 호의적으로 변한 것 같다. 낮에 동생을 휠체어에 앉혀서 병실에 두고 잠시 진료를 보러 내려갔는데 그 사이에 마음의 문을 열고 친해진 듯해 보였다. 동생이랑 만날 기회가 없었던 병실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동생을 알아가게 된 듯하다. 동생이라도 예쁨을 받아서 다행이다. 처음에 적대적이었던 간병인도 동생은 마음에 들었는지 동생이 앓는 소리를 내면 슬쩍 다가와서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젊으니깐 빨리 회복할 것 같다면서 응원을 한다.


 또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슬며시 무언의 압박을 주는 분도 있었는데 오늘은 나에게 불을 꺼도 괜찮은지 물어보길래 동생도 피곤해서 빨리 잠들 것 같다며 괜찮다고 알려드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상황이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초반에 삐그덕거렸던 문제들은 일시적인 것들로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점차 이곳의 병실생활에 익숙해지면 금방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걸 보니 살면서 꼭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