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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y 16.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77 - 뜻밖의 여정

2023년 4월 19일 수요일


 서울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날이다. 내일이 되면 집으로 내려가게 되겠지만 그전처럼 우울하지는 않았다. 분명 또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서울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로 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친구와 양화한강공원에 가서 피크닉을 즐기기로 했다. 원래라면 1시에 만나 근처 식당에 들러 미트파이를 먹고  갈 예정이었지만 예약을 하려고 보니 휴무인 바람에 친구가 도시락을 싸 오기로 했다. 역시 우리의 만남에는 철저한 계획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모든 것이 순간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더니 친구에게 출발했냐는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돗자리를 깜박하고 안 가지고 나와서 다시 집으로 가는 중이라며 천천히 오라고 한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옷가게에 들러 예정에도 없던 쇼핑을 했다. 역시 돈을 모으는 것도 좋지만 쓸 때도 신난다. 병원에만 있느라 요즘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러운지 몰랐는데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갑자기 여름이 되었다. 어제 날씨가 서늘해서 오늘 두껍게 입고 나왔더니 너무 더워서 시원하고 얇은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나온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갔다가는 쪄 죽을 것 같아서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친구와 당산역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피크닉을 즐기기에 좋은 명당자리를 찾으려고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걷고 있는데 하얀 솜들이 우리를 덮쳐왔다. 친구는 옆에서   없는 괴성을 지르며 옷을 털어냈나는 민들레씨가 날아와서 옷에 묻어도 마냥 행복했다.


 어제도 놀고 오늘도 놀고 있지만 마치 새로운 느낌이었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길을 걸으면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그냥 느낌 따라, 기분 따라 걷다 보니 돗자리에 앉아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푸른 나무와 들판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한강까지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이렇게 평온하게 있어도 되는  맞는지 의심이  정도로 편안했다. 돗자리에 앉아서 친구가   소불고기 유부초밥을 먹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혼자 있는 시간도,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평온한 순간으로 지금이 꿈인지 병원에 있던 시간이 꿈이었는지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로 현실감각이 사라졌다. 내 몸안 있는 세로토닌, 엔도르핀, 도파민과 같은 행복 호르몬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히 나 자신만을 돌아보는 게 얼마만인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친구와 수다를 떨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음 행선지를 골랐다. 가고 싶은 카페가 도보로 40분이라는 말을 듣고 약간 고민하다가 소화도 시키고 산책도 할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남들은 한창 일하고 있을 평일 낮에 한가롭게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날씨가 더워서 땀이 났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은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대교를 중간쯤 도착했을 때 계속 직진하려는데 조금 전 자전거를 타고 우리 앞을 스쳐간 분이 다시 돌아오며 말을 건넸다. 지금 앞쪽이 공사 중이라 지하도를 이용해 돌아서 가야 할 것 같다며 소식을 전해주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서 그분이 가는 길을 졸졸 따라서 무작정 걸었다. 공사로 인해서 원래 가려고 했던 도로가 막혀서 반대쪽으로 가다 보니 합정역까지 도착했다.  

 

 지도를  우리가 찾던 카페를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해서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아 나섰다. 골목 사이 틈으로 들어서니 카페가 없을  같은 곳에 숨어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니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지만 자유롭게 있을  있어서 좋았다. 케이크와 음료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친구가 하나로는 만족이  됐는지 케이크 2개와  1개를  샀다. 그걸  먹고 있으니 하루치 당을 초과한 듯한 달콤함이 몰려왔다. 케이크는 맛있었지만 느끼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나와 친구는   먹었으니   먹어야 한다며 저녁으로는 고기와 된장찌개를 먹자고 입을 모았다.   


 일단 밖으로 나서기 전에 무엇을 할지 정하다가 오랜만에 코인 노래방을 가기로 했다. 검색을 해보니 홍대입구역 근처까지 가야만 놀거리가 많을  같아서 이동하기로 했다. 오늘은 하염없이 걷는 날인가 보다. 그래도 구경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거리로 들어섰다. 병원의 분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장소에 오니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곳으로 와서 그런지 평소에 울적했던 기분이 날아가는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쇼핑도 하고 사람 구경을 하다가 코인 노래방을 가서 열심히 지르고 나왔더니 허기가 졌다.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거리에 서서 어느 식당을 갈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친구가 선택한 고깃집을 찾아갔다. 평소에 나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법한 식당이었다. 네이버 평점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입장에서는 평점이라도 보고 가야 평타를 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평점 4.5점 이하는 께름칙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친구가 고른 곳은 평점이 4.19점인 곳이었다. 무슨 기준으로 고른 거냐고 물어보니 친구는 평점이 4점 이상만 되면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오히려 5점이라 나와있어도 그만한 값을 하지 못하는 곳이 더 많다며 터무니없이 2점이나 3점이 아니라면 갈 수 있다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자주 갔던 식당도 맛은 괜찮은데 이상하게 평점이 낮은 곳들이 있었다. 그래도 맛이 별로인지 위생이 별로인지 어떤 것 때문에 저 점수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가지고 찾아갔다.


 멀리서 식당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일단 외관상으로 봤을  허름한 곳은 아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부도 넓고, 위생도 깨끗했다. 사장님과 직원들도 친절하고 우리가 주문한 고기의 질도 상당히 좋았다. 반찬도 깔끔하게 나오고 맛있었다. 친구가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지 않냐며 모르고  곳인데  고른  같다며 말하길래 인정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을 끝내고 나서 무엇 때문에 평점이 낮았는지 의문을 가지며 친구와 토론을 하면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만으로도 수다가 끊김이 없었다. 결국 열띤 토론의 결과 정답은 없었다. 역시 사람 입맛과 취향은 주관적이라서 네이버 평점은 객관적인 지표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지었다. 우연찮게 맛집을 발견했다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나서 오늘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하였다.



 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을 할 일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따로 있다. 물론 계획한 일들이 차근차근 진행될 때 느껴지는 성취감도 좋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가진 기억을 떠올려보니 추억으로 남은 것은 내 예상과 벗어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 주말만 되면 가족과 함께 방방곡곡 여행을 다녔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무엇을 한 것보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 안에서 느꼈던 설렘이 더 기억에 남는다. 우리 가족은 목적지를 정해놓고도 정해진 길로만 달리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도 길 옆으로 보이는 예쁜 마을이 있으면 목적지를 가는 길이 아니라도 꼭 한번 들려본다. 엄마가 예쁘다고 말하면 아빠는 운전대를 틀어 그곳으로 향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가 아니라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가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맛집을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옆 식당이나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우리만 아는 맛집을 발견하며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뜻밖의 여정에서 발견한 맛집과 좋았던 곳들은 기록을 해두고 다시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부모님만의 철학이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좋은 것, 나쁜 것을 직접 경험해 보며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더라도 설령 간단한 길을 놔두고 돌아갈지라도 편법을 쓰지 말고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상을 살아가라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길이 있다며 어딘가에 꼭 도착해야 하는 것보다도 그 여정 속에서 오는 즐거움과 재미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부모님은 나에게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즐기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 내가 받았던 그 가르침은 아빠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자는 아빠였고 그렇기에 내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를 부정했다. 똑같이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말하는 모든 것들에 귀와 마음의 문을 닫았다. 목표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목표를 성취하지 않으면 과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의미 없는 시간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무언가를 시작할 때 마음껏 즐기면서 하기보다는 항상 빨리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일을 했다.


 배움에서 오는 즐거움, 경험에서 오는 즐거움은 모르겠고 내가 하는 모든 경험들은 어차피 미래의 양분이 될 것이라는 일념 하나로 견뎌냈다. 즐기는 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는 것을 되새기며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말 그대로 나는 온전하게 즐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억지로 즐기는 척을 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서 어느 순간부터는 즐겁지가 않았다. 나는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항상 어제의 나와 경쟁을 하였다. 남들이 인정해도 스스로 만족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는 사람이 되었을 뿐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버티기만 하다가 나는 결국 꺾여 버렸다.  


 더 큰 세상으로 나와서 꺾이고 멈추게 되니 깨달았다.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온몸에 힘을 주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힘을 줘야 할 시기가 있고 힘을 빼야 할 시기가 있는데 나는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웠다. 천천히 가는 법보다는 빠르게 가는 법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주변에 소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내가 돈을 많이 벌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은 없었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직 미래만을 바라보고 달리다 보니 정작 내 주변을 챙기지는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도 한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이 나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바뀌는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고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이제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즐기는 법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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