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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y 17.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78 - 나의 둥지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거제도로 입고 갈 옷 몇 벌과 화장품, 집에 놔두면 유통기한이 지날 것 같은 과자를 챙겼다. 서울에서 떠나는 마지막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컵라면만 먹다가 오랜만에 끓인 라면을 먹으니 역시 맛있었다. 서울 자취방에는 한 동안 올 수가 없으니 분리수거와 쓰레기봉투를 정리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잠시 갔다가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며 허공에다 외쳤다. 그렇게 언제 돌아올지 모를 주인을 기다려야 하는 불 꺼진 빈 방을 눈동자 안에 가득 담고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에 맞춰 승차권을 예매했다. 광명역으로 가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슬프진 않았다. 왠지 내가 생각했던 날짜보다 빠른 시일 내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얻은 값진 시간 속에서 세상을 탓하고 서글퍼하면서 하루를 낭비할 순 없었다. 이 황금 같은 휴식기간을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보낼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날 말릴 수가 없다.


 울산역에 도착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면서 호두과자를 하나 사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앉았다. 20분 정도 기다리면 될 것 같아서 멍하니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호두과자를 한 개 꺼내 들었다. 포장지를 까서 입으로 넣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바삭한 식감이 아니었다. 요즘 호두과자 안에는 커스터드 크림과 모차렐라 치즈와 같은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지만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오직 팥으로만 이루어진 옛날 호두과자였다. 눅눅하고 식은 호두과자를 먹고 있으니 옛 추억이 떠올랐다.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를 샀다. 어느 휴게소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두과자를 사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엄마가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다른 음식을 사 왔고 나는 노릇하게 구워지는 호두과자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어린아이에게는 혹독했을 만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 보상으로 바삭하고 달콤한 호두과자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호두과자를 먹어도 그때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호두과자를 한알씩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추억을 곱씹고 있으니 버스가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창문 너머로는 노을이 지고 있다. 분명 부푼 기대를 안고 서울로 상경했던  엊그제 같은데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결국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결국은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인생에서의   도약을 위해 잠시 주춤하는 시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슬프지는 않았다.  행운이 오기 전에 나타 병목현상쯤으로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를 실은 버스는 한참을 달려 우리 집 앞까지 도착했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나의 발걸음은 나름 가벼웠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쳐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현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선 나를 보자마자 그동안 고생했다며 안아주었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할머니가 손수 만든 김밥과 나물 반찬들을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옆에서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며 잘 먹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쉬고 싶을 걸 알면서도 보고 싶어서 한번 와봤다며 오늘은 할아버지를 혼자 내버려 두고 나와 함께 자고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남은 시간 동안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할 일이 없으면 할머니집으로 와서 쉬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냥 혼자 집에 있고 싶다고 말하니 알았다고 하면서도 일주일 내내 고독만 씹고 있을 거냐고 물었다. 병원에서 타인의 간섭을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쉬는 동안은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할 거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할머니는 나를 쓰다듬으면서 엄마를 대신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휴대폰을 하면서 소파에 기대어 있으니 할머니는 자기 품으로 들어오라며 팔을 벌렸다. 나는 할머니 곁으로 슬금슬금 기어가서 품 안으로 쏙 들어가 서로를 꽉 끌어안고 누웠다.


 나에게는 한 없이 큰 사랑이었던 할머니의 품에 안겨있으니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나를 지켜주던 둥지에서 떠났고 다시 돌아와 보니 내 몸집보다 컸던 둥지는 나보다 작아져 있었다. 할머니의 무릎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나는 어느새 훌쩍 자라서 할머니의 얼굴과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나의 몸집이 커진 세월만큼 할머니는 작아졌지만 나에게 주는 사랑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 할머니랑 껴안고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삭막한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사랑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행복했다. 언제나 나를 믿고 든든하게 지켜줄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이 있었다. 나는 헌신적인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나라는 존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가족들로부터 다양한 사랑을 받아왔고 지금도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준다. 때론 가족의 사랑이 버겁고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랑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내가 물려받은 자산이 꽤나 많았다. 이제라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조금씩 발견하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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