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일기 81 -평온한 하루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다. 병원에서의 습관 덕분인지 알람 없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았다. 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폰을 켜보니 카톡 알림으로 가득 쌓여있다. 카톡을 열어보니 친구들이 어제 찍은 사진들을 보내놓았다. 우리가 찍은 사진은 천장을 가뿐히 넘겼고 슬슬 휴대폰 용량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소파에 누워서 어제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재밌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자유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이 공간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내가 하는 것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녔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옆에서 감시하고 있다.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정체는 바로 우리 집 터줏대감인 고양이 ‘동글이’이었다.
요즘 동글이는 엄마가 요 근래 면회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워서인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지금 둘째가 아픈 바람에 우리 집 막내인 동글이랑 놀아주는 사람들은 없고 혼자 남겨둘 때가 많았다. 엄마는 집 밖을 나서면 동글이 걱정을 집 안에 있으면 아들 걱정을 해야 했다.
그래도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던 건 며칠간 집을 비워둬야 할 때면 할머니가 집에 들러서 동글이의 밥을 챙겨주고 배변 모래를 갈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동글이는 자신을 챙겨주러 온 할머니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고 한다. 원래라면 사람을 오히려 무서워해서 숨어 다녔던 아이였는데 요즘에는 사람이 오면 그 옆에 찰싹 붙어있다.
그래서 때 아니게 나를 귀찮게 하는 털뭉탱이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내가 어딜 가든 추격자처럼 쫓아왔고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와서 내보내기를 반복했다. 글을 쓸 때면 옆에 와서 괜히 치근덕거리거나 누워있는 내 배 위로 올라와서는 앉아 있었다.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자기를 혼자 두고 어딜 갔다 왔냐며 서럽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에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 옆 소파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부드러운 고양이 털을 매만지는 이 평온함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이 시간이 오늘따라 소중하게 느껴졌다.
모처럼 집에서 마음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삼촌한테 연락이 왔다. 할머니 생신을 미리 앞당겨서 오늘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였다.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도 다 됐고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을 한다고 하니 안 나갈 이유가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집에만 있을 예정이었기에 씻지도 않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있어서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재빠르게 씻고 나갔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꽉 끌어안았다. 분명 며칠 전에 만났는데도 몇 달 동안 못 본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가족들은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가자며 나에게 결정권을 주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한우는 어떴냐는 삼촌의 말에 냉큼 좋다고 대답했다. 세상에서 음식 결정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동생이 다친 이후에는 기념일이 있어도 다 같이 만나기가 힘들었다. 만나더라도 화두가 되는 건 동생 상황뿐이었다. 할머니는 한우를 먹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밥도 못 먹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속상해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희망과 걱정이 교차하는 지금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 함께하는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때는 근심 걱정으로 얼룩진 일상이 아니라 웃을 일만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