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자리

by Story in Mind

한국의 월스트릿, 여의도.

매일 아침, 높은 하이힐을 신고 깔끔한 오피스룩에 맞는 향수를 뿌린 채 출근길에 올랐다.


북적대는 지하철에서 아침부터 코 끝을 파고드는 땀냄새를 피하면서도 내가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갑옷이 필요했다. 그렇게 향수를 입는 생활이 일상이 됐다.


이십 대 여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의 보편성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회사 안팎으로 마주해야 했던 음흉한 시선과 호의인 듯 내 몸에 닿는 타인의 터치를 대수롭지 않은 듯 다뤄내고, 매일 이어지는 회식을 감당하기 위해 마시지도 않는 술을 사 미리 맛보고 버텨보는 연습을 했다.


"승아 씨, 오늘 저녁은 요 앞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 씩들 하는 걸로 하지. 오늘 누구누구 참석할지 한번 소집해 봐."


나를 뽑아주신 은인이자 날카로운 카리스마의 마케팅 총괄 전무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직원들의 회식 소집을 지시했다. 그 지시가 싫지만은 않았다. 나름 부서 내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지지와 총애를 받는 직원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런 자질구래한 일들마저 성실히 챙기며 내 입지를 다지는 평판으로 활용했다.


오늘의 건배사와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유머와 뉴스를 검색하고, 전무님이 좋아하시는 취향의 맥주를 파는 근처 호프집들의 리스트를 찾고. 좋은 자리를 물색해 가게 예약을 하는 것은 물론, 나와 같이 나름 전무님이 가까이하시는 직원들을 선별해 그날그날의 자리 배치까지 계획했다.


보통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마담이 나오는 곳에도 함께 동행하곤 했다.

처음 보는 관경들에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리기도 하고, 민망한 장면들에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요령도 갖춰야 했다.


"승아야, 너 여자 아니지?"


마담언니를 무릎에 앉힌 모습으로 질문하는 전무님께 술잔을 들고 대답했다.


"그럼요, 전무님. 자! 모두 한 잔 하시죠!"


버텨야만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서러웠다.


나의 스물여섯은 그렇게 뿌연 물안갯속에 머물러있다.

새로운 시작이지만 옴짝달싹 못한 긴장과 두려운 시선에 갇힌 채.

매일 서럽게 울고 있었다.




# 살기 위해 떠나온 자리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는 항상 멍이 배어있었다.

엄마를 향한 손찌검의 표적이 내게로 옮겨온 것은 사춘기를 지나면서였다.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빠를 대신해 일을 하는 엄마에게 향한 아빠의 분노는.

엄마를 대변하며 대항하는 나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돈 많이 든다는 미술을 전공하고, 없는 형편에 해외 연수도 보내준 부모로서 그 정도의 손찌검과 욕설은 별개 아닌 흔한 일이라고 했다. 모두 나의 잘못이라 했다.

아빠가 두렵고 내가 좀 더 다루기 수월했던 나의 엄마가, 늘 그리 말했다.


나 때문에 이혼을 못한다던 엄마는 나 때문에 살얼음 같은 집안 분위기가 됐다며 날 책망했다.


'하... 내가 왜 태어났을까..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 내가 살아있는 건가? 드라마처럼 난 지금 다른 인생을 보고 있는 건가?

여기가 현실일까?'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된 질문은 '탈출'을 꿈꾸게 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탈출을 바랐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어떤 욕설도, 어떤 부름도, 어떤 깨어짐도, 어떤 터치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승아야, 너 어디니? 아빠가 화가 엄청나셨어.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마라!

너 들어오면 사달날 것 같아. 근처 찜질방에 가서 자."


화가는 굶어 죽는다는 부모님의 반대로 취업이 가능한 디자인과로 대학을 진학하고,

현실에 맞춰 졸업 이후 취업의 방향을 광고인이 되는 것으로 정한 때였다.


수도권의 대학연합 광고동아리에 들어가 매일 공모전과 인터쉽을 지원하며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기획서를 작성하고 광고물을 만들었다. 당연히 귀가시간은 늦어지고, 그때마다 집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계집애가 겁도 없이 매일 밤늦게 집에 기어들어오고!

미친년, 저년 저거 뭐에 씐 거지? 저 썅년 집에 들어오면 죽여버린다고 해!

씨발년, 지가 뭐가 잘났다고 맨날 늦게까지 싸돌아다녀! 들어오면 배 떼기를 갈라 오장육부를 조져 놓을 테니까 나가 뒈지라고 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험한 욕설과 살얼음 같은 집안 분위기는 언제나 나의 귀갓길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했다.


'오늘도 잠 자기는 글렀네.. 찜질방 비용이 얼마였더라..'


PC방이 있는 찜질방으로 들어가 밀린 학교 과제를 하고, 수면방에 들어가면, 그 곳에서도 술에 취해 나체로 잠을 자거나 남녀가 뒤엉켜 움짤 거리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앳된 모습의 이십 대는 거의 혼자였기에 낯선 이들의 어물쩍 넘어오는 팔과 다리에서 매번 몸을 다시 일으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단칸방이라도 그냥 편히 누울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적막한 고요 속에 갇혀 깨지 않고 잠들고 싶어..'


나의 바람은 결국 이뤄졌다.

찜질방을 전전하다 고시원 생활을 하던 나는 계약직 취업을 하고 나서야 시장 한 켠, 다세대 주택의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밤을 맞을 수 있었다.



스물여섯.

살기 위해 가장 안전한 혼자가 되었다.


# Can we meet?


"I'll visit Korea in July for conference, if you have some time can we meet to say hello?"


"Sounds nice. I'm not sure it would be ok, but feel free to contact me when you come to Korea.

I'll check my schedule that day."


"That's great! Let's see, take your time.

It's pretty late here now, I'm heading home tomorrow, need to get some rest now."


"Sure, take care. See ya"


샌프란시스코의 바람을 타고 오듯 재회의 인사를 건넨 나의 이십 대.

우리의 마음은 서로의 젊은 날을 추억하는 아련함이 되었지만 너의 모습에서 다시 볼 수 있을 나의 지난날이 기대가 되기도, 두렵기도 하다.


기대되는 것은 몇 안 되는 나의 안전하고 행복했던 지난날을 재회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불안전한 내 모습이 부끄러울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Can we mee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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