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북이 울린다 둥둥둥
우리의 시계는 여섯 시 삼십 분"
네가 쓴 시가 생각나. 첫 부분만.
40년이 흘렀으니 아마 죽을 때까지 안 잊힐 거야.
우리가 춘천에 가기로 약속하고 퇴계로 동국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세 시간을 기다렸지.
네가 구속되었다는 말은 다음 날 네 친구한테 들었어.
학교 옥상에서 친구를 도와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전단을 뿌린 게 네 죄랬어.
넌 운동권도 아니었는데.
그때 우리는 손도 잡지 않은 사이였지.
네가 먼저 다가왔고, 나도 조금은 마음이 풋풋했어.
너는 춘천의 안개를 보러 가자고 했어.
시 쓰는 사람답게 그냥 춘천도 아니고 안개 낀 춘천도 아닌
‘춘천의 안개’랬어.
춘천의 안개는 특별할 것 같았어.
너랑 함께 보면 더 근사할 것 같았지.
구치소에서 편지가 왔어.
나는 필요한 책을 넣어주고 답신을 보냈지.
그리도 또 너의 답신이 도착했지.
편지는 날마다 계속됐어.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한 마디라도 더 쓰려고 엽서의 날개에까지
너의 말이 가득했어.
초록색 글씨였던 것 같아. 어렴풋이 생각나.
나는 답장을 안 할 수 없었어.
춥고 어두운 독방에서 오직 내게 편지를 보내고 답신을 받는 것만이
너의 한 줄기 햇살이었을 테니까.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의 사랑도 깊어졌어.
아니, 이건 거짓말이야.
우린 시 쓰는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만났고,
춘천의 안개를 보았다면 그게 첫 데이트였을 테니.
말은 순간 지나가지만, 글은 계속 남아서 읽을수록 감정이 더 깊어져.
특히 너처럼 혼자 조용히 편지를 읽을 때 내 마음이 더 잘 느껴졌을 거야.
어떤 말은 직접 듣는 것보다 글로 볼 때 더 울컥하지.
독방에서 내 편지만 기다리는 너를 생각하며 내 감정도 조금씩 섬세해졌어.
편지의 내용은 깊어졌고, 그에 답하는 너의 글은 절절했지.
"북이 울린다 둥둥둥
우리의 시계는 여섯 시 삼십 분"
내 퇴근 시간
드디어 둥둥둥 북이 울리고 너는 비밀의 정원에서 나를 만났어.
마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톰처럼,
감방 벽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고,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을 발견했어.
거기서 나와, 너만의 시간을 보냈지.
네가 석 달 만에 풀려났을 때, 너는 나에게 미쳐 있었어.
하루라도 안 만나면 못 견디겠다고 했지.
전화를 못 받는 날엔, 네 목소리가 떨렸어.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어.
처음엔 미안했어.
근데, 그 미안함이 점점 숨을 막기 시작했어.
감정 사이로 틈이 생기고, 어느 날 문득 도망치고 싶더라.
크리스마스이브 날,
너는 퀭한 눈으로 내게 반지를 내밀며 손가락에 억지로 끼워주었어.
거리에서 우리는 소리치며 싸웠고,
흥겹고 분주한 발걸음들 사이로
난, 반지를 빼 던져버렸어.
그리고 우리의 시간도 반지처럼 내팽개쳐져 더는 찾을 수 없었지.
내가 스레드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얼마 후,
네가 내 글을 엿보는 걸 알았어.
댓글에서 살짝 설렘도 느껴졌지.
그때처럼 도망치고 싶었어.
계정을 닫았는데,
네가 감옥에서 내 글을 기다리던 때가 생각나더라.
내 답신을 기다리는 매 순간, 애끓고 피가 말랐을 네가 보이더라.
그래서 다시 열었지.
몸은 늙어도 감정은 나이를 안 먹기도 하나 봐.
네가 보낸 마지막 시가 생각나.
"한 천 년쯤 지난 뒤 한 마리 들쥐로 태어나
네 발밑을 기어 다니고 싶다."
지금도 춘천에는 안개가 자주 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