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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사우스포 Apr 14. 2020

속이는 게임

인간관계는 마피아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겪다 보면 마음에 빗장을 채운 뒤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며 수다를 떨고 밥을 먹고 여행을 가게 된다.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하고 있다.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뼛속까지 스윗한 사람도 그 내면은 다를 수 있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속이는 게임을 한다. 속이는 게임은 군사작전, 비즈니스, 스포츠에서도 꼭 필요한 기술이다. 브라질 축구 대표 출신의 선수 네이마르(Neymar)―현재 소속 팀은 파리 생제르맹―는 상대 수비수를 탁월한 페이크 기술로 속인다. 그가 쓰는 하이퍼 촙, 사포, 솜브레로 플릭 같은 개인기를 볼 때면 “미쳤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삶에는 어떤 이론이나 공식으로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적 이슈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누구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불편하지만 그저 무시하고 침묵할 때 작가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애쓴다. 김언수의 『설계자들』은 살인청부업자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에 보면 ‘추’라는 킬러가 표적인 여자를 사창가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한 뒤 살려주는데, 여자는 죽을 줄 알면서도 그곳으로 돌아간다.       


여자는 사창가를 역겨워하면서도 돌아갔다. 잘 모르는 낯선 곳으로 가는 것보다는 역겨워도 익숙한 곳이 나았기 때문이다.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을 싫어하면서도 꾸역꾸역 버티고 살아간다. 작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정확하게 무엇 때문에 고통 받고 갈등하는지 잘 모른다는 걸 꿰뚫어 보고 있다. 선과 악은 그 경계가 불분명하며 인간은 우주만큼 복잡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걸 스릴러 소설로도 보여준다.   

   

사회도 길을 잃을 수 있고 개인도 길을 잃을 수 있지만 확률적으론 개인일 때가 더 많다. 작가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 아주 큰일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의 한 구석을 동여맨 체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본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의 삶을 샘플로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어둠을 탐색할 용기를 준다. 문학은 삶을 스캔한 뒤 그 내면을 서사(narrative)라는 방식으로 복기하여 우리가 자신을 점검하도록 그래서 더욱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도와준다. 이런 점에서 소설은 두 번째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난다. 몸은 마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백년도 살지 못하는 데도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고 시기하고 고통 하며 허겁지겁 살아간다. 조바심을 내고 걱정하며 쫓기듯 산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진정한 삶에는 두려움과 조바심이 아닌 공감이나 미덕 같은 품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론과 현실은 시선이 엇갈리는 법이지만 인간이 자존심이 상했거나 배신을 당했거나 하고 싶은 것을 못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 경우에, 짜증이 나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고 때로는 폭력 같은 후회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언어와 문화와 배경이 달라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대개 비슷하여 생각이 나뉘는 경우는 드문데,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인간사도 마피아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가면과 그림자가 있다. 사회생활에 충실하려 가면을 쓰지만 마음속엔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이 있다.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해하려 했지만 그 길은 프로이트가 1899년 『꿈의 해석』을 쓰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 같은 심리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보면 나를 안다는 것은 발견임을 깨닫게 된다.      


프로이트가 마음을 해독하는 새로운 방법―정신분석―을 찾아낸 이후, 우리는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무의식이 하는 역할이 의식보다 크며 현재의 생각이나 감정 혹은 행동이 과거에 겪은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들은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 콤플렉스 같은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을 쓰진 않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문학에선 여러 개념 중 특히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림자를 찾으려면 내면을 채우는 감정의 움직임을 모니터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다들 자신을 가리고 살고 그 마저 힘들면 술로 감추려고 한다. 열심히는 살아도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저 주말을 기다리며 핫한 노래를 듣고 웹툰을 보고 셀카를 찍는 것이 일상이 된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문학은 이렇게 태평하게 살고 있어도 실제론 마음속 깊은 곳에 슬픔을 감추고 있다는 걸 서사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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