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느낌을 손에 잡히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작가를 보면서 하는 생각
시나 소설을 읽다 보면 정말 멋진 문장을 만나 밑줄을 긋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권대웅의 시집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는 제목부터 도파민이 터지게 합니다.
그런 느낌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을 때도 느꼈습니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시인이나 작가가 그런 빛나는 문장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들은 그저 부유할 따름인데 시인이나 작가는 그런 막연한 느낌이나 생각을 손에 잡히도록 적어 냅니다.
느낌은 막연하고 무질서하나 그 막연한 느낌이 선명하게 격발되는 순간이 창조적 영감일 텐데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 루소는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고 하네요. 우리에게 자발적 고립은 산책을 하고 등산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이겠지요.
뭔가에 집중하는 것이 작가의 재능일테지만 인류학 책 <실존적 인류학>을 읽으니 프랑스 인류학자 알베르 피에트는 다르게 풀어내네요.
인간이 가진 삶의 방식은 고릴라나 침팬지와 다르다네요. 침팬지는 먹이를 구할 때 우리와 달리 산만해지는 법이 없답니다. 체계적으로 실수없이 행동한다네요.
하지만 인간은 수시로 딴생각에 빠지고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해 산만해진답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는 몽상에 빠지고 갈팡질팡하고 쉽게 산만해집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는 그 덕분에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좇지 않게 되고
진지하면서도 가벼울 수 있고 무언가에 몰두하다가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어서 삶에 균형이 생긴답니다.
그러고 보니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쓴 문장이 정말 맞네요.
"우리의 의식 속에 가라앉은 진실은 때때로 게으름 속에서, 몽상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성급하게 변화하려하기보다 여유를 가지고 때론 게으름을 피우며 사유하는 게 어쩌면 진정한 삶의 행복을 얻는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과 작가의 빛나는 문장이 늘 부럽기만 했는데 그게 몽상이나 게으름 같은 생각의 빈틈에서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저도 도전해볼 용기가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