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아이

오피스 에세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

by 어니스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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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차갑다. 출근길,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핸들을 잡은 손이 시렸던 건 단순히 날씨 탓만은 아니다. 2025년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내 머릿속은 이미 재난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다. '대표님이 뜬금없이 다른 팀 골칫덩이 프로젝트를 우리 팀에 떠넘기면 어쩌지?' '거절했다가 무능한 팀장으로 찍히면?'

내 뇌라는 녀석은 참 겁쟁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마치 확정된 재난처럼 부풀려 배달해 주니 말이다. 그렇게 잔뜩 날이 선 채,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울 갑옷을 입고 대표실 문을 두드린다. 차가운 문손잡이에 닿은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난다.

"어서 와요, 김 부장. 앉으세요."

대표님의 편안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밤새 준비했던 방어 논리들이 하얗게 증발해 버린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를 옥죄던 갑옷을 툭, 벗어던진다. 있는 그대로의 맨몸을 보여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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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올해 진행한 워크숍은 기획 의도대로 안 됐습니다. 직원들 만족도도 낮았고요."

내년 팀장 자리에 대한 욕심마저 내려놓는다.

"내년엔 복직하는 P 부장이 저보다 훨씬 잘 이끌 겁니다. 저는 보직 희망서에 빈칸으로 내겠습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꺼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공기는 부드러웠고, 이 정도 온도라면 내년 보직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괜찮겠다는 직감이 스친다. '보직 희망서에 빈칸으로 내겠습니다.' 그 말을 하자 대표님은 마치 호기심 많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신다. 그 눈망울이 어찌나 맑은 송아지처럼 순수한지, '이유가 뭐예요?'라고 묻는 표정에 내 이야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경청의 진심이 가득하다. 그 무해한 눈빛에 무장 해제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속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 놓는다.

그런데 돌아온 건 불호령이 아니라 대표님의 함박웃음이다.

"무슨 소리예요. 김 부장의 색깔도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해요. 1년만 하고 물러나기엔 너무 아까운 리더입니다."

순간 멍해진다. 완벽한 성과를 보고하려 애쓸 땐 그리도 불안하더니,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빈손을 내미니 오히려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임원들의 평가가 아니라,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나약함이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라는 게 훈훈한 장면에서 멈추지 않는다. 면담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현실은 다른 얼굴을 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내년도 업무 분장과 예산을 논의하러 온 타 부서 부장과의 회의.

그는 교묘하다. 평소엔 느긋하던 사람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자기주장을 관철해야겠다 싶으면 목소리의 속도부터 빨라지는 습관이 있다. '아시다시피 우리 팀 리소스가 너무 부족해서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들. 겉으로는 회사의 효율성을 말하지만, 빨라진 말속도는 조급한 욕망의 증거다. 숨 쉴 틈 없이 자기 논리를 밀어붙이는 그 모습은 철저히 자기 팀의 이익, 아니 밥그릇을 사수하겠다는 신호다. 힘든 업무는 쏙 빼고 성과 나는 일만 가져가려는 태도. 방금 전 대표실에서 느꼈던 어른스러운 존중과는 정반대의 계산이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다. 협상이 잘 안 돼서가 아니다. 그의 태도가 참을 수 없이 싫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자기 실속만 차릴 수 있지?'

퇴근길, 그 불쾌감이 가시질 않는다. 보통의 업무 스트레스라면 맥주 한 캔으로 털어버렸을 텐데, 이 분노는 끈적하게 마음에 달라붙는다. 도대체 왜 나는 유독 그에게 그토록 화가 나는 걸까?

곰곰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던 그때, 문득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타인의 어떤 모습이 유독 참을 수 없이 싫다면, 그것은 당신 내면의 '그림자'가 투사된 것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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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웠던 진짜 이유는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나도 이기적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가만 보니 그도 절박했던 거다. '그렇지, 지금이 기회다. 이때다' 싶었겠지. 팀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싸워서 일을 줄여왔어'라고 생색낼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 말이다. 결국 그도 부원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에 허덕이는,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중간 관리자였다. 밉상인 행동 이면에 숨겨진 그 인정 욕구를 읽어내자, 마냥 미워만 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대신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내년도 기획안을 다시 펼친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기 싫은 숙제였던 종이가, 이제는 내 뇌를 즐겁게 할 흥미진진한 게임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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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을 들어, 그 위에 나만의 색깔을 거침없이 채워 넣기 시작한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억지로 구색을 맞추는 계획이 아니라, 진짜 내가 그려보고 싶었던 그림을 그린다. K 부장이 밥그릇을 챙기든 말든, 그건 이제 그의 사정일 뿐이다. 타인의 욕망을 질투하느라 내 소중한 감정의 잔고를 바닥내기엔, 지금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아이디어들이 훨씬 더 가치 있으니까.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이 몰입의 시간. 창밖의 겨울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내 마음에는 둥글고 평안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그래, 내 삶은, 그리고 나의 일터는 이만하면 꽤 괜찮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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