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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작

by 어니스트 정

3월의 아침, 김현우는 창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도 뒤숭숭한 것이 그의 마음 같았다.

어제 아내 수진과의 다툼은 밤새 풀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지나갔고, 아이들만 평소처럼 재잘거렸다. 그런데다 오늘은 조직개편 후 새 부서 첫 출근이었다.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출근길에 오른 기분이었다.

겉옷을 입고 현관문을 열려는 찰나, 수진이 말을 걸었다.

“오늘 첫 출근이지? 잘 적응해.”


김현우는 잠시 멈췄다. 수진의 목소리에는 어제의 날카로움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아마 늦을 거야. 새 부서라 인사도 해야 하고.”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화는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새 부서에 들어서며 건네는 인사말은 몇 번이나 연습했지만, 막상 소리 내어 말하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른 직원들도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들 역시 바쁜 업무 속에 곧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김현우에게 배정된 자리는 사무실 구석, 창가 쪽이었다. 적어도 프라이버시는 보장될 것 같아 작은 위안이 됐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모든 것이 낯설었다. 키보드의 감촉, 마우스의 무게감, 의자의 높이까지. 자신에게 잘 맞게 조정되어 있던 이전 부서의 책상이 그리웠다.

컴퓨터를 켜자 이상하게 느렸다.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마다 버벅거렸고, 해야 할 일의 3분의 2도 처리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김 부장님, 일 괜찮으세요?”

옆자리의 조 대리가 물었다.

“아, 네…. 아직 좀 적응 중입니다.”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경직된 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업무 공유 계정에 로그인하려 했지만, 계속 틀린 비밀번호라는 메시지가 떴다. 화가 치밀었다. 자꾸 접속이 안 되니 필요한 자료를 볼 수 없어 업무가 지체되었다.

‘이러다 첫날부터 일을 제대로 못 하는 무능한 부장으로 찍히는 거 아닌가.’


자신의 능력을 항상 의심하는 버릇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작년에 고생했던 프로젝트들, 밤을 새워가며 완성했던 보고서들이 떠올랐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현우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앞에서 무능하게 앉아 있느니, 차라리 화장실에 가서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마흔여섯 살. 이미 중년의 얼굴이었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진 것 같았고, 머리카락도 분명 더 많이 빠졌다. 김현우는 얼굴에 물을 몇 번 끼얹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침착하자. 첫날이니까 괜찮아.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잘하진 않아.’

자기 위안의 말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화장실을 나오려는 찰나, 안쪽 칸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자기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니.

"김 부장님, 괜찮으세요?"

부서장인 최 이사의 목소리였다. 김현우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오전에 제가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최 이사는 손을 씻으며 말했다. “첫날이라 긴장되시나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부서는 다들 편안한 분위기거든요. 게다가 김 부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교육 분야에서는 전문가로 알려져 있잖아요.”

김현우는 의외의 칭찬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오늘은 가볍게 적응하시고, 내일 점심에 우리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나눠요. 제가 부서 업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최 이사의 친절한 제안에 김현우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화장실을 나오면서, 그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적어도 부서장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것 같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김현우는 자신이 전 부서의 계정을 입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 부서의 공유 계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기억력에 어이가 없었다.


“아, 바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올바른 계정으로 로그인하자 필요한 자료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제야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동종 업계에서 자문을 구하는 전화가 왔다. 김현우는 상대방의 질문에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했지만, 새 부서의 업무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깔끔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쪽으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더 자세한 내용은 내일 확인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항상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자책하는 버릇이 있었다.

“김 부장, 퇴근 시간인데 첫날부터 야근하게?”

인사과 이 부장이 김현우의 책상 앞에 나타났다. 아직 복지위원회 건으로 신경이 쓰였지만, 김현우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이제 정리하고 가려던 참이야.”

“그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첫날이라고 꽃이라도 사 가.”

이 부장의 제안에 김현우는 웃음을 지었다. 수진과의 다툼을 생각하면 꽃보다는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작은 선물이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나서며, 김현우는 근처 꽃집에 들렀다. 화려한 장미 다발보다는 소박하지만 향기로운 프리지아 몇 송이를 골랐다. 수진이 좋아하는 꽃이었다.

지하철로 가는 길, 꽃을 든 김현우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승객이 있었다. 아마도 데이트를 하러 가는 남자로 보인 모양이었다. 김현우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차창 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흘러갔다. 3월의 서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곳곳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벚꽃 축제 포스터가 지하철역마다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봄이 오는구나.’

김현우의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첫날부터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을 너무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어색하고 불편한 법이다. 그저 하루하루 익숙해지는 과정을 즐겨야 했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김현우는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실수도 있었고 어색한 순간도 많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현관문 앞에 서서 김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에는 그냥 열쇠로 문을 열곤 했지만,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문이 열리고 수진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김현우가 든 꽃다발로 향했다.

“이게 뭐야?”


“새 부서 첫날 기념이랄까?”

김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꽃을 건넸다. 수진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 들어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민우가 달려와 안겼다. “아빠, 오늘 학교에서 백 점 맞았어!”

“와, 우리 민우 대단한데! 무슨 과목?”

“수학이요!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어요.”

지은이도 방에서 나와 인사했다. “아빠, 오늘 첫날 어땠어?”

김현우는 아이들에게 간단히 새 부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불안감이나 실수는 빼고, 좋은 부분만 골라서. 아이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녁 식사 중, 수진이 물었다. “정말 괜찮아? 새 부서는?”

김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쁘지 않아. 부서장도 친절하고.”

“다행이네. 걱정했어.”

짧은 대화였지만, 어제의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진 듯했다. 둘 사이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지만,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평화로웠다.

식사 후,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에 남았다. 수진은 꽃병에 프리지아를 꽂으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하지. 우리가 데이트할 때 항상 이거 좋아했잖아.”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10년도 더 된 일인데.”

“그래도 중요한 건 잊지 않아.”

수진은 김현우 옆에 앉았다. “어제는 미안해. 내가 좀 과민하게 반응했어.”

“아니야, 나도 신경질적이었어. 서로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아.”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나왔지만, 둘 다 듣고 있지 않았다.

“이번 주말에 우리 가족 나들이 갈까?” 김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진이 놀란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정말? 어제 그렇게 반대하더니?”

“내가 생각해 봤는데, 가끔은 돈보다 중요한 것도 있는 것 같아.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잖아. 비용이 많이 드는 곳 말고, 근교에 있는 공원이나 그런 데 가자.”

수진의 눈이 반짝였다. “고마워. 그럼 내가 도시락 준비할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았다.

침실로 향하기 전, 김현우는 내일 입을 셔츠를 다림질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아직 새 부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기 전, 김현우는 오늘의 실수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실수를 인정하고, 배우고, 더 나아지는 것이 김현우의 방식이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 들어왔다. 수진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김현우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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