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새로운 부서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미세하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내 교육 부서. 직원들이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할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역량 강화를 위한 연수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이런 부서로 이동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조직개편 통보를 받았을 때는 당혹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배치는 아닌 것 같았다. 김현우는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지만, 의외로 발표나 교육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 앞에서 발표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난 오전, 김현우는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문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은 자꾸 신입직원 교육자료 만드는 쪽으로 향했다. 오후 2시부터 신입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다.
‘원래 계획은 오전에 행정 업무를 끝내는 거였는데….’
김현우는 자신이 교육자료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좀 더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계는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 부장님, 점심 드셔야지요?”
최 이사의 목소리에 김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약속대로 오늘은 부서장과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날이었다.
“네, 물론이죠.”
회사 근처 조용한 식당에서, 최 이사는 김현우에게 부서의 업무와 비전에 관해 설명했다.
“우리 회사가 지금 변화의 시기잖아요. 신임 사장님도 오셨고, 시장 환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이런 때일수록 직원들의 역량 강화가 중요해요.”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직원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야 회사도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김 부장님을 우리 부서로 모신 거예요. 부장님의 경험과 전문성이 우리 부서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 이사의 말에 김현우는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발탁’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인사이동의 일환으로 자리가 바뀐 것이라고 여겼는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온 것이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교육 분야에서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부장님이 이전 부서에서 보여준 업무 처리 능력과 프레젠테이션 실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요. 특히 오늘 오후에 있을 신입사원 교육, 기대하고 있어요.”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김현우는 최 이사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새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번 인사이동은 실패가 아니라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인사 교육부 김현우 부장입니다.”
회의실에 모인 20여 명의 신입직원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김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걱정과 설렘이 섞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김현우는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11년 전, 그 역시 이런 눈빛으로 교육실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 회사의 기본 가치와 업무 수행 시 꼭 알아야 할 원칙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 텐데요, 그전에 먼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김현우는 자기소개로 포문을 열었다. 그의 특기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말할 때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에 질문하는 습관이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을 김현우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자기소개와 함께 회사에 입사하게 된 계기, 그리고 앞으로의 포부를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김현우는 진심 어린 미소와 호응으로 그들을 격려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신입직원들도 점차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신입사원까지 자기소개를 마치자, 김현우는 본격적인 교육 내용으로 넘어갔다. 회사의 역사, 조직 구조, 중요 정책과 규정 등 기본적인 내용부터 시작해,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위한 팁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여러분,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질문을 던지자 신입사원들이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다.
“ 실이요!”
“ 객 만족이요!”
“ 팀워크요!”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 두 훌륭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어요. 바로 ‘성장’입니다.”
김현우는 화면에 그래프 하나를 띄웠다. 시간에 따른 개인의 성장 곡선을 보여주는 그래프였다.
“여러분이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매일매일 조금씩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지식과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요. 저도 11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죠.”
그의 진솔한 이야기에 신입사원들은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김현우는 자신이 경험했던 실패와 성공의 사례들을 공유하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전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은 더 큰 실패입니다. 매번 실패에서 배우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성장하세요.”
2시간의 교육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는 신입사원들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김현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답변했다.
“오늘 배운 내용 중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여러분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교육을 마치며, 김현우는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신입직원들이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에서 에너지를 얻은 듯했다.
“김 부장님, 오늘 교육 정말 좋았습니다.”
회의실을 나오는 길에 최 이사가 왔다. 그는 교육 시간 내내 뒤쪽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에요, 신입사원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특히 부장님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김현우는 최 이사의 칭찬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내심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이었다.
“사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저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중간 관리자 교육이 있는데, 그것도 김 부장님이 맡아주셨으면 해요.”
“네, 기꺼이 맡겠습니다.”
최 이사의 제안에 김현우는 주저 없이 수락했다. 처음에는 새 부서로의 이동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한 기회로 느껴졌다.
오후 사무실로 돌아온 김현우는 며칠 동안 미루고 있던 업무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새 부서로 온 뒤로 끙끙대며 피해 왔던 복잡한 데이터 분석 작업이었다.
‘오늘 다 못해도 괜찮아. 파일만 열어도 잘한 거야.’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파일을 열었다. 마감 시간까지 최대한 자신을 몰아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아뿔싸….”
한 시간쯤 고민하던 김현우는 결국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파일을 열고 문제를 직면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삼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박 과장님, 혹시 시간 되세요?”
옆자리에 있는 박 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부서에서 꽤 오랫동안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이 데이터 분석 작업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김현우의 요청에 박 과장은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그는 복잡해 보였던, 문제를 더 간단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몇 가지 유용한 팁도 공유했다.
“이렇게 하면 훨씬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처음에는 어려워했거든요.”
박 과장의 도움으로 김현우는 예상보다 빨리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방법임을 깨달았다.
‘내일은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집에 돌아가는 길, 김현우는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그는 조금씩 새로운 부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오늘 교육 시간은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였다.
지하철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이번 인사이동은 그에게 숨겨진, 혹은 잊고 있던 재능을 일깨워주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수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김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신입직원 교육했는데 반응이 좋았어. 내가 생각보다 교육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 정말 좋은 일이네. 내가 항상 네가 가르치는 재능이 있다고 했잖아.”
저녁 식사 중에 김현우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가족들과 나누었다. 오랜만에 직장에서의 성취감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아빠, 그럼, 이제 선생님 같은 거예요?” 민우가 물었다.
김현우는 웃었다. “그런 셈이지. 회사에서 선생님 역할을 하는 거야.”
“아빠가 우리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 민우의 말에 가족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정말 다행이다. 네가 새 부서에 적응하게 돼서.” 수진이 말했다.
“응, 나도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맞는 것 같아. 특히 교육하는 부분에서.”
“내가 봐도 오빤 가르치는 재능이 있어. 항상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도 차분하고 명확하게 하잖아.”
김현우는 수진의 말에 따뜻함을 느꼈다. 서로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나누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둘 사이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내일은 교육 계획안을 좀 더 다듬어 봐야겠어.”
김현우는 내일의 업무를 생각하며 말했다. 부담감으로 시작했던 새 부서에서의 생활은 이제 작은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밤늦게 침대에 누워, 김현우는 자신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역할, 그리고 발견한 새로운 재능. 모든 것이 그에게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봐야지.’
그는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