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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쁨들

by 어니스트 정

대강당 안으로 들어서며 김현우는 시계를 흘끗 바라봤다. 오전 10시. 오늘은 다른 업체와의 MOU 체결식이 있는 날이다. 회사의 모든 부장급 이상 직원들은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꼭 이렇게 모두 불러 모아야 할까?’

김현우는 자리에 앉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이런 허례허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업무량이 많은 부장급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 못마땅했다. 오너는 상대 업체에 대한 기본예절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회사 오너만 이런 것일까?

대강당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졌다. 옆자리에 앉은 이 부장이 속삭였다.


“작년보다 규모가 더 커진 것 같은데?”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이런 행사도 점점 더 대규모로 진행되는 듯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기업 간 협력을 강조하는 인사말, 양측 대표의 축사, 그리고 기념 촬영까지. 30분 동안 진행된 행사 내내 김현우는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관행은 없어져야 하는데….’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지만, 오너에게 방울을 달 용기는 없었다. 그저 속으로 투덜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행사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김현우는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바라보았다. 연초라 그런지 부장급들은 연일 야근 행진이었다. 김현우도 야근해야 할 만큼 업무가 많았지만, 되도록 저녁은 집에서 먹으려고 노력했다. 집에서의 따뜻한 온기가 회사의 답답함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후 내내 교육 계획서를 작성하던 김현우는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번 신입사원 교육의 성공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중간 관리자들을 위한 더 심도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 부장, 오늘 저녁에 시간 돼?”

프로젝트팀 윤 부장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우리 팀에서 신제품 발매 기념으로 회식하려고. 너도 와서 같이 하자.”

김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회식. 그가 가장 불편해하는 자리였다. 특히 술자리는 더더욱. 하지만 요즘 새 부서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너무 혼자만의 시간을 고집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잠깐 들를게. 근데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

윤 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8시에 ‘산들정’에서 보자.”

키보드를 두드리며 김현우는 회식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난번 신임 사장 취임 회식의 어색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볼 생각이었다.


“김 부장님, 퇴근하세요?”

옆자리의 박 과장이 물었다.

“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회식 장소로 향하는 길, 김현우는 지난 며칠간의 변화를 되돌아보았다. 새 부서에서 예상보다 빨리 적응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특히 교육 업무는 생각보다 훨씬 즐겁게 느껴졌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과정. 모든 것이 새로운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산들정'은 회사에서 자주 이용하는 한식당이었다. 들어서자 프로젝트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 부장, 여기!”

윤 부장이 손을 흔들었다.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축하해, 신제품 발매. 소문 들었어. 시장 반응이 아주 좋다면서?”

윤 부장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훨씬 좋아. 이번 분기 목표는 쉽게 달성할 것 같아.”

첫 술잔이 돌아가고, 김현우는 평소처럼 건배만 하고 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발매한 제품의 특징이 뭐예요? 저희 교육팀에서도 영업사원들 교육할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의 질문에 프로젝트팀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제품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현우는 진심으로 관심을 두고 경청했다. 이런 정보는 나중에 교육자료를 만들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김 부장님, 술 안 드세요?” 팀의 젊은 대리가 물었다.

“아, 저는 술을 잘 못해서요. 운전도 해야 하고.”

“운전이라….” 윤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택시 타고 가면 안 될까? 우리가 태워줄게. 이번 제품 발매는 정말 의미가 큰데, 다 같이 한잔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김현우는 망설였다. 예전의 흑역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었다. 그는 이제 신입사원도 아니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 한잔만 할게.”

소주 한 잔을 받아 든 김현우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윤 부장과 팀원들의 진심 어린 환대에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잔, 두 잔. 김현우는 자신의 한계를 지키며 적당히 마셨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회식 자리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업무적인 이야기를 넘어, 취미나 가족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김 부장, 테니스 치신다면서?” 윤 부장이 물었다.

“가끔 치는데, 어떻게 알았어?”

“지난번에 사내 동호회 명단에서 봤어. 나도 테니스 좋아하거든. 다음에 같이 쳐.”

“그래? 좋아. 나도 무릎 부상 때문에 잠시 쉬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 나아져서 다시 시작하려던 참이었어.”

윤 부장과 테니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현우는 오랜만에 직장 동료와 업무 외적인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식이 끝나고, 김현우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그는 오늘 저녁의 기억을 되새겼다. 불편할 것이라 예상했던 회식이 의외로 즐거웠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주말 아침, 김현우는 일찍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테니스 동호회에 나가기로 한 날이다.


“이렇게 일찍 어디 가?” 수진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니스 치러. 무릎이 좀 나아져서.”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와. 무리하지 마.”


아파트를 나서면서 김현우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셨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테니스장으로 향하는 길,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김 부장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테니스장에 도착하자 동호회 회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늦게 도착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들 몸 관리 잘하셨나 봐요. 전 한참 쉬었더니 손에 감각이 없네요.”


겸손하게 말했지만, 김현우는 라켓을 쥐는 순간 익숙한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두 게임을 하고 레슨을 받는 동안 숨이 턱턱 막혔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운동의 즐거움은 그 어떤 피로감보다도 컸다.

“부장님, 다음 주에도 꼭 오세요. 우리 다 같이 맥주 한잔해요.”

마무리 인사를 하며 회원들이 제안했다. 김현우는 처음에는 동호회를 그만둘까 생각했었지만, 오늘의 분위기를 보니 상반기는 더 다녀보고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게요. 다음 주에 또 뵙죠.”


약속하며 김현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테니스장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현우는 이번 주를 되돌아봤다. 답답했던 MOU 행사와는 달리, 테니스 동호회 시간은 활력이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고민하던 프로젝트 계획에 대한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도 있구나.’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문제를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해결의 실마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오래 고민하던 문제가 어느 순간 풀리는 경험은 마치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주차하면서, 김현우는 이번 한 주가 꽤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허례허식의 행사로 시작했지만, 오랜만의 테니스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로 마무리된 하루. 작은 기쁨들이 모여 하루를 빛나게 만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민우가 달려와 안겼다.

“아빠, 오늘 테니스 재밌었어?”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민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정말 재밌었어. 아빠가 오랜만에 운동해서 좀 피곤하긴 한데, 기분은 좋아.”

“다음에 나도 테니스장 가고 싶어. 테니스 배우고 싶어.”

김현우는 민우의 열정적인 눈빛을 보며 웃었다. “그래, 다음에 같이 가자. 아빠가 가르쳐 줄게.”

수진이 부엌에서 나왔다. “잘 다녀왔어? 밥은 먹었어?”

“응, 회원들이랑 간단히 먹었어. 오랜만에 운동하니까 힘들긴 하네.”

“그럼, 오늘은 좀 쉬어. 저녁은 내가 할게.”


김현우는 소파에 앉아 깊은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피로했지만, 마음은 오랜만에 가벼웠다. 그는 문득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았다. 회사에서의 업무, 가정에서의 역할, 그리고 자신만의 취미 생활. 모든 것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잠든 뒤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에서 와인 한 잔을 나눴다. 평소에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김현우였지만, 오늘은 특별히 수진이 와인을 따랐다.


“요즘 오빠가 달라진 것 같아.” 수진이 말했다.

“그래? 어떻게”

“좀 활기차 보여. 예전에는 항상 피곤해 보였는데, 요즘은 뭔가 즐거워 보여. 새 부서가 잘 맞는 것 같아?”

김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부서에서의 역할, 동료들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인식.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맞아. 나도 그걸 느껴. 처음에는 부서 이동이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내가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인생이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해.”

김현우는 와인잔을 들어 수진의 잔과 부딪쳤다. “이런 대화 언제 해봤더라?”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 수진이 웃었다.


그 순간, 김현우는 자기 삶에 감사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작은 기쁨들이 모여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MOU 행사에서 불편함, 테니스 동호회에서의 즐거움, 가족과 평화로운 시간. 모든 경험이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조각들이었다.

이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행복의 비결일지도 모른다고 김현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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