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6시. 대부분 직원이 즐거운 주말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퇴근하는 시간. 하지만 김현우는 사무실 컴퓨터 화면에서 여전히 깜빡이는 커서와 씨름하고 있다. 사내 교육 프로그램 시스템에 연간 교육 계획을 입력하는 작업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김현우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시스템 자체의 오류인지, 아무리 시도해도 교육 내용 입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세 시간째 같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교육 계획 입력이 왜 이렇게 까다로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금을 반납하고 야근을 하는 중이었지만, 결국 신경질만 내고 있을 뿐. 한 주 내내 컴퓨터와 씨름한 김현우는 뜻대로 되지 않는 업무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김 부장님, 아직도 일하세요? 주말인데 쉬세요.”
청소 아주머니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그만 남아 있는 직원은 자신 뿐이었다.
“네, 곧 마무리하고 가려고요.”
그러나 김현우의 말과 달리, 시스템은 여전히 오류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몇 번 더 시도한 후, 김현우는 결국 올해 사업 교육 계획을 입력하지 못한 채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주말에 해결해야겠다.’
집으로 가는 길. 김현우는 자신의 무력감을 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 김현우는 아내 수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회사에 좀 다녀와도 될까? 어제 마무리 못 한 일이 있어서….”
수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녀와. 하지만 늦지 말고 와. 지은이랑 민우가 주말에는 아빠랑 놀고 싶어 하니까.”
김현우는 고마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아직 자는 동안 조용히 집을 나섰다.
토요일 회사는 평일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텅 빈 사무실, 울리지 않는 전화기, 조용한 복도. 김현우는 이런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어제의 작업을 이어갔다.
아직 새 부서의 자리가 낯설어 업무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방해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김현우는 업무를 볼 때 혼자 조용히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오전 내내 교육 계획 입력에 몰두하던 중,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2시가 되고 있었다. 아내가 집에 도착하라고 한 시간인 오후 3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스템 오류로 방금 입력한 내용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뿔싸”
김현우는 좌절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스마트폰에서 연달아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아들 민우였다.
[아빠 언제 와? 같이 놀기로 했잖아.]
[아빠, 빨리요. 기다리고 있어.]
김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오늘 교육 일정을 제출해야만 다음 주부터 모든 직원이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 팀 전체, 나아가 회사의 일이었다.
‘조금만 더.’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고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1시간 30분 동안 더 작업한 끝에 마침내 계획했던 교육 일정 입력을 완료했다.
“드디어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김현우는 시스템을 로그아웃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텅 빈 사무실을 나서며, 김현우는 문득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일중독인 걸까? 아니면 그저 책임감이 강한 건가?’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일을 마무리하는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회사에 대한 책임감인지, 아니면 그저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강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김현우는 스스로 다짐했다.
‘일중독이든, 책임감이든,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초점을 잊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회사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봄 햇살이 그를 반겼다. 오후 4시 30분. 아내와 약속한 시각보다 한참 늦었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저녁 식사와 함께할 시간은 충분했다.
김현우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은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기로 약속했다.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 그것이 그에게 남은 또 하나의 숙제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김현우는 작은 장난감 가게에 들렀다. 민우가 좋아하는 로봇 피규어와 지은이를 위한 책을 샀다. 작은 선물이지만, 늦게 귀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벤치에 앉아 있는 민우가 보였다. 아들은 김현우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아빠! 너무 늦었어!”
민우의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김현우는 아들을 안아 들었다.
“미안해, 아빠가 일이 조금 길어졌어. 이것 봐, 민우 좋아하는 거 사 왔어.”
로봇 피규어를 본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와! 이거 갖고 싶었던 건데! 고마워, 아빠!”
집에 들어서자 지은이는 방에서 나와 아빠를 맞이했다. 김현우는 책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요즘 베스트셀러래. 아빠가 늦어서 미안해.”
지은이는 책을 받아 들며 웃었다. “괜찮아, 아빠. 이 책 읽고 싶었어. 내가 읽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
“비밀이지.” 김현우는 윙크했다. 사실 몇 주 전 지은이가 핸드폰으로 이 책을 검색하는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수진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쌌다.
“미안해, 늦어서.”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일 끝냈어?”
“응, 드디어. 다음 주부터는 좀 수월할 거야.”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녁 먹고 아이들이랑 보드게임 하기로 했으니까 준비해.”
저녁 식사 후, 가족은 거실 탁자에 모여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민우가 가져온 부루마블 게임이었다. 처음에는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김현우의 피로는 점차 사라져 갔다.
“아빠, 이번에 내 땅에 걸렸어! 통행료 내야 해!”
지은이의 말에 김현우는 장난스럽게 신음했다. “아이고, 또 망했네. 아빠 이제 파산이야.”
게임 중에 김현우는 문득 이런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평일에는 야근으로, 주말에는 추가 업무로 종종 이런 시간을 놓쳐왔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에게 진정한 행복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아이들이 잠들 시간이 다가오자, 수진은 그들을 재우러 데려갔다. 김현우는 혼자 거실에 남아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업무와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자신처럼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오늘처럼 양쪽 모두를 챙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수진이 거실로 돌아왔다. “애들은 잘 자. 피곤해 보이네.”
“응, 좀 그렇긴 한데, 오늘 아이들이랑 시간 보내서 좋았어.”
수진은 김현우 옆에 앉았다. “새 부서 적응하느라 힘들지?”
김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적응하는 과정이니까. 하지만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 그래도 가끔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나도 마찬가지야. 팀장 되고 나서 업무량이 확 늘었거든. 상사는 불도저처럼 일을 벌이고, 나는 그걸 다 처리해야 하고.”
김현우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동안 수진의 고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힘들지? 회사에서는 팀장이라 책임져야 하고, 집에서는 엄마로서 또 해야 할 일이 많고.”
수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가끔은 정말 힘들어. 하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잖아. 넌 네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김현우는 수진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이해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우리 서로 조금씩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뭐. 너도 오늘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한 건 네 책임감 때문이잖아. 그게 네 모습이고.”
김현우는 수진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자신도 그녀를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했다.
“나도 이제 네 입장도 좀 더 생각해 볼게. 우리 서로 조금씩 배려하면서 살아가자.”
수진은 미소 지었다. “그래, 그게 부부지. 그리고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그냥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해.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김현우는 그 말에 생각했다.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이 때로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다 정작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노력할게. 쉽지는 않겠지만.”
수진은 장난스럽게 김현우의 팔을 쳤다. “그래도 오빠가 책임감 강한 사람이라 좋아. 일은 일대로 잘하고, 가족한테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회사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까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완벽한 균형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왜 중요한지 잊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