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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와 감사

by 어니스트 정

아침 6시 30분, 김현우의 집에서는 이미 부산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김현우는 재료들을 꺼내며 순두부찌개를 준비하고 있다. 요즘 들어 짓눌렸던 업무 스트레스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완화되는 것을 느꼈지만, 여전히 아침은 전투와도 같다.

“지은아, 민우야, 일어나! 학교 늦겠다!”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 옆으로 반찬들을 정리하며 김현우는 복도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리 분주한 아침이라도 김현우는 자녀들의 아침 식사를 꼭 챙겼다. 간단한 계란 프라이나 토스트가 아닌,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된장찌개와 같은 따뜻한 한식을 고집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아빠, 오늘 순두부찌개 냄새 진짜 좋다!”

열두 살 민우가 기지개를 켜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지은이는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지은아! 생일인데 학교 늦을래?”

김현우의 외침에 마침내 열다섯 살 지은이가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방에서 나왔다.

“아빠, 나 오늘 생일이라고 안 가면 안 돼?”

김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일이라도 학교는 가야지. 저녁에 케이크 사 올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김현우는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또 출근 데드라인을 간신히 지킬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아침을 제공하고, 그들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김현우는 며칠째 골머리를 앓던 교육 프로그램 문제에 다시 집중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갑자기 실마리가 보였다. 몇 주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각보다 단순한 오류였던 것이다.

“해결됐다!”

김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주변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짓눌렸던 업무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김현우는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지난 몇 주간의 업무 스트레스도 ‘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해결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점심시간, 갑작스러운 소식이 사무실을 뒤덮었다.

“김 부장님, 혹시 들으셨어요? 박지호 대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대요.”

옆 부서 과장의 말에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조문을 가려고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김현우는 빈소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조문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동료의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고인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던 중, 옆자리에 있던 동료가 갑자기 말했다.

“김 부장님, 저기 사진 보셨어요? 이상하게 정우성하고 닮지 않았어요?”

김현우는 무심코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사진 속 인물은 분명 정우성, 10여 년 전 그와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후배였다.

“저…. 저 사진이 누구죠?”

김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자신도 같은 사진을 봤지만, 그 사진이 정우성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아마도 옛날 사진을 장례식장에 걸어놓은 것 같았다.

정우성은 10여 년 전 김현우의 팀에서 일했던 신입사원이었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 했지만, 김현우의 도움으로 조금씩 성장했던 후배였다. 몇 년 전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소식이 끊겼었다.

김현우는 어떻게 조문을 드려야 할지, 정우성의 부모님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10여 년 전의 일이라 부모님들이 자신을 기억할지도 의문이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조심스레 정우성의 부모님께 다가갔을 때,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는 김현우를 한눈에 알아보셨다.

“아이고, 김 대리님 아니세요? 우리 우성이가 늘 말했어요. 대리님 덕분에 회사생활 잘 적응했다고, 늘 감사하다고…."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현우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힘내시라고, 밥 잘 챙겨 드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김현우의 마음은 무거웠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밝고 유능했던 후배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우성의 죽음은 김현우에게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항상 내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우성의 삶이 보여주듯, 내일은 누구에게나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일까?’

김현우는 차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회사에서의 성공, 승진, 인정. 그것들은 중요하지만,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아빠, 케이크! 친구들 곧 올 거야.]

집에 돌아오자마자 지은이의 재촉이 이어졌다. 오늘은 지은이의 생일이었다. 안타까운 동료의 죽음, 딸의 생일, 그리고 아침에 해결된 업무까지. 하루 동안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케이크를 들고 들어오는 김현우를 보며 지은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김현우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하찮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요 며칠 업무 스트레스를 종종 가족에게 풀었던 것이 미안해, 김현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지은이를 낳아줘서 고마워. 정말 감사해.]

아내는 ”감동이야 “라며 화답했다.

민우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민우야, 새 학기에 잘 적응해 줘서 고마워. 아빠가 자랑스러워.]

민우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대신 아내가 보낸 메시지에 학원비 결제를 위해 가져간 카드로 군것질한 영수증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김현우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지은이의 생일 케이크 앞에서 가족들이 모였다. 촛불을 바라보며 김현우는 생각했다. 정우성의 갑작스러운 부고, 그리고 오늘의 생일 축하까지. 삶은 이렇게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원 빌고 불어!”

지은이가 눈을 감고 소원을 빌 때, 김현우는 자신만의 소원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하자.’

촛불이 꺼지고 어둠이 잠시 방을 감쌌을 때, 김현우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떠난 정우성을 위해 짧은 기도를 올렸다.


밤늦게, 아이들이 잠든 후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정우성 씨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대.”

수진의 눈이 커졌다. “정우성? 옛날에 오빠랑 같이 일했던 신입사원? 그렇게 젊은 나이에?”

김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겨우 마흔이었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유가족은 많이 힘들겠네.”

“응, 부모님이 많이 괴로워하셨어. 자식 먼저 보내는 부모 마음이 어떨지….”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잠겼다. 그들도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그 슬픔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지은이 생일 파티하면서 계속 그 생각이 났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수진은 김현우의 손을 잡았다. “맞아. 우리는 매일 감사해야 해.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김현우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작은 일들에 스트레스받고 화를 냈는지 돌아보았다. 돈 문제, 직장에서의 인정, 일상의 소소한 불만들. 그 모든 것이 갑자기 하찮게 느껴졌다.


“나 요즘 많이 생각해. 우리가 정말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뭔지. 매일 바쁘게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수진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해. 특히 팀장 되고 나서 더 바빠지니까,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어.”

“맞아.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뭘까?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 아니면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또 다 맞는 것 같아. 복잡해.”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답은 없는 것 같아. 그냥 각자의 방식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거겠지.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나는 깨달았어.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오늘 갑자기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거구나. 나도 너무 감동하였어.”

“앞으로는 더 자주 표현할게.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그날 밤, 김현우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정우성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소중한 깨달음도 주었다. 삶은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소중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눈을 감기 전, 김현우는 정우성을 떠올렸다. 항상 밝게 웃던 그의 모습.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함께 일했던 시간들이 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우성아, 편히 쉬어. 네가 남긴 영향력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하루를 더 소중히, 더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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