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김현우는 묵직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휴일을 알리는 듯했지만, 그에게는 그저 업무를 처리할 또 다른 날 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7시 30분. 이미 알람이 울린 지 30분이나 지났지만, 잠에서 깨지 못했다.
‘음….’
몸을 일으키자 어깨가 뻐근하게 결렸다. 어제는 부서 업무를 위해 늦게까지 야근했다. 지난 2주 동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 중독자로 변해있었다. 업무 파악이 왜 이리 늦은 건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지친 한 주다.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세수하려는데, 아내 수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출근이야?”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린 업무가 있어서…. 오후에 올 거야.”
수진도 최근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퇴근 후에는 더 힘들어하는 기색이다. 상사가 불도저식으로 일을 벌이는 바람에 고생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현우는 가족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두통약 한 알을 삼키며 김현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싱크대에는 설거짓감이 쌓여있고, 거실에는 빨랫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성격에 이런 상태로 집을 나서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질끈 감고 출근하기로 했다. 아이들과 아내는 주말의 달콤한 늦잠을 자고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며 김현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 B형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얘들아, 아프지 말자.’
토요일 회사는 고요했다. 간혹 다른 부서에서도 출근한 직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날이면 오히려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었다.
김현우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지난주 내내 해결하지 못했던 교육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다. 차분한 환경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역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해.’
중간에 커피를 마시러 휴게실로 향하던 김현우는 복도 끝에서 윤 부장을 발견했다. 그도 주말 출근한 모양이었다.
"윤 부장! 너도 토요일 출근이야?"
윤 부장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품 발매 마무리 작업이 있어서. 김 부장은?”
“나도 교육 기획서 마감이 월요일이라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중년 남성부장 둘이 토요일 아침에 사무실에서 만난다는 것이 왠지 우스웠다.
“우리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아?” 윤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김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다들 주말 여유롭게 보내는데, 우리는 여기서 일하고 있으니”
“근데 나는 요즘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과연 누구를 위한 건지 생각해.”
윤 부장의 갑작스러운 철학적 질문에 김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우성의 죽음 이후로 그도 비슷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가족은 오히려 우리가 덜 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길 원하잖아.”
윤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내도 늘 그래. ‘이렇게까지 일에 매달릴 필요 있어?’ 하고. 하지만 뭐랄까, 이건 습관 같은 거야. 우리 세대는 이렇게 일하도록 훈련받았잖아.”
“그래, 그놈의 책임감이 뭐라고.”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커피를 마셨다.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어떤 때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일에 매달리면서도, 정작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
윤 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김 부장은 교육 담당이잖아. 직원들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일이니까 의미가 있지. 나는 그저 제품 하나 더 팔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중이니까.”
“하지만 네가 개발한 제품이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잖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니까?”
윤 부장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철학적인 대화는 여기까지 하자. 다들 제 자리에서 제 무게를 감당하는 거지 뭐. 다시 일하러 가야겠다.”
김현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김현우는 윤 부장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각자의 무게.’ 그 표현이 꽤 마음에 와닿았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책임과 부담, 그리고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 무게를 감당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겠지만, 누구도 그 무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두 가지 업무를 처리하는데 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김현우는 잠시 의자에 기대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이 자리가 어색하다고 느꼈다. 해야 할 일이 더 있었지만, 오늘 오후는 가족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며, 김현우는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회사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되는 회사 밖 풍경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회사에는 다양한 보직이 있다.
편한 업무, 어려운 업무, 기피 업무. 어떤 업무를 맡느냐에 따라 1년 회사생활의 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인 듯했다.
올해도 누군가는 기피 업무, 어려운 업무를 맡았다. 그런 동료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동료들에게 감사함이 느껴졌다.
‘각자의 자리에 있어 줘서 감사하다.’
적색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김현우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좀 더 존귀하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맡은 교육 부서 업무도 기피 업무 1순위였고, 정말 피하고 싶은 업무였다. 김현우도 계속 빠져보려 했지만, 결국 맡게 됐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김현우는 어려운 업무, 기피 업무를 맡은 동료들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신호가 바뀌고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것들아, 너희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이 정도로 해주니 너희는 편하게 근무하고 있는 거야.”
아무도 듣지 않는 차 안에서 김현우는 혼자 피식 웃었다. 힘들었던 한 주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김현우는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았다. 업무 스트레스,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까지. 모든 것이 그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집 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현우는 문득 이 소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며,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빠 왔다!”
민우의 반가운 목소리에 김현우는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결국 이것이 그의 삶의 이유였다.
수진이 부엌에서 나왔다. “일 잘 마무리했어?”
“응,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주말에는 방해가 없어서 집중이 잘 되더라.”
“다행이네. 우리는 영화 보려고 준비 중이었어. 같이 볼래?”
김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근데 먼저 샤워 좀 하고.”
샤워하면서, 김현우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힘든 일도 많고, 때로는 무게감에 짓눌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돌아올 집이 있고, 함께할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거실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영화를 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지은이는 팝콘을 만들고, 민우는 소파에 쿠션을 정리하고 있었다. 수진은 영화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뭐 볼 거야?” 김현우가 물었다.
“아이들이 새로 나온 애니메이션 보고 싶대. 괜찮아?”
“당연하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현우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영화를 시청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팝콘 먹는 소리, 그리고 때때로 들려오는 수진의 감탄사. 평범한 주말 오후의 풍경이었지만, 김현우에게는 이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후,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 정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윤 부장이랑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 김현우가 말했다.
“오, 윤 부장님도 오늘 출근했어?”
“응, 우리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짐을 지고 있는 거지.”
“그래, 난 그 말이 계속 생각나더라. 내가 힘들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힘든 거야. 그래서 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요즘 참 철학적이네. 정우성 씨 일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삶과 죽음, 의미와 가치.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돼.”
“그건 좋은 일이야. 그런 성찰이 너를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김현우는 수진의 말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녀는 항상 그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다.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고 의견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했다.
“고마워, 여보. 넌 항상 내 곁에 있어 줘서.”
수진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김현우를 바라보았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그날 밤, 김현우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각자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관한 생각,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함께 인생의 무게를 나누어지고 있는 수진과 아이들에게 감사함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김현우는 그 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무게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