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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일발

by 어니스트 정

월요일 아침, 회의실은 각 부서 대표로 가득 찼다. 김현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 몇 주간 신경 쓰이던 일이 드디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인사과 이 부장이 계속해서 넌지시 언급했던 사내 복지위원회 위원 선출 건이었다.


“오늘은 올해 사내 복지위원회 구성을 위한 회의입니다.”


이 부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지만, 오늘은 특히 더 의욕적으로 보였다. 김현우는 자리에서 몸을 약간 움츠렸다. 이 부장이 자신에게 지목했던 그 ‘사장님의 추천’이 곧 공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시다시피, 사내 복지위원회는 직원들의 복지와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중요한 기구입니다. 올해도 각 부서에서 한 명씩 위원을 선출하려고 합니다.”

이 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김현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럼, 부서별로 추천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 옆 박 차장이 이 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했다.


“먼저 기존에 복지위원을 역임하셨던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공정한 기회 배분을 위해 참고하려고 합니다.”


김현우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몇 년 전 그가 복지위원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옆자리에서 박 차장도 손을 들었다. 김현우는 놀란 눈으로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 부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박 차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사내 고충 복지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한 번 역임했던 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기 위해 재임을 권장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박 차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복지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연임은 되도록 피하고,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운 인원 구성을 권장한다고 합니다.”


김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걱정했던 위원직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김 부장님과 박 차장님은 후보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겠네요. 다른 분 중에서 추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장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김현우를 바라보았지만, 김현우는 모른 척 회의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

‘박 차장님이 이렇게 은인이었을 줄이야.’

김현우는 가슴속으로 박 차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뜻밖의 구원투수가 나타난 셈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환호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각 부서에서 새로운 위원들이 추천되었고, 김현우는 그저 조용히 과정을 지켜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 부장이 김현우에게 다가왔다.

“김 부장. 사장님이 특별히 기대하셨는데….”

김현우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규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할 수 있으면 했을 텐데.”

그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복도로 나오자 박 차장이 다가왔다.


“김 부장님, 복지위원회 일 하기 싫었죠? 표정에서 다 보이던데요.”


김현우는 놀라서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솔직히 말하면 그렇긴 했어요. 위원회 업무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박 차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몇 해 전에 해봐서 알아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야 하더라고요. 서류 작업도 많고, 여러 부서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스트레스도 상당했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김현우는 박 차장과 동질감을 느꼈다.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동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오늘 점심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감사의 의미로.”


김현우가 제안했다.

박 차장은 환하게 웃었다. “좋죠. 위원회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나쁘지 않겠네요.”

점심시간, 김현우와 박 차장은 회사 근처 맛집으로 유명한 무한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박 차장님, 제육볶음 좋아하세요. 여기 맛집이거든요.”

“저도 동료들과 종종 찾는 곳이에요.”

“다행이네요. 차장님과 식사 자리는 처음이라.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 내심 걱정했어요.”
“걱정하지 마셔요.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저도 그래요. 차장님.”

“그리고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부담에서 벗어났어요.”

박 차장은 슬며시 웃었다.


“뭘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근데 정말 궁금한 게, 왜 그렇게 위원회 일을 피하려고 하셨어요? 김 부장님은 원래 책임감이 강하신 분 아니었나요?”

김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책임감 문제라기보다는, 그 일이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번에 했을 때도 많은 제안을 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건 거의 없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결국 회사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역할에 그치더라고요.” 두 사람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업무 이야기, 회사생활, 그리고 개인적인 취미까지. 김현우는 오랜만에 직장 상사와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느꼈다.

“김 부장님, 요즘 교육 부서에서 적응은 어떠세요?"”


박 차장이 물었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지금은 꽤 만족하고 있어요. 특히 교육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그러실 것 같았어요. 부장님이 항상 후배들 챙겨주시고 가르쳐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김현우는 놀랐다. 자신이 그런 인상을 주고 있었다니. “정말요 그렇게 보였나요?”

“네, 회사에 눈들이 많잖아요. 많은 동료가 부장님을 존경해요, 아마 모르실 뿐이지.”

김현우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영향력이 있었다니. 정우성이 떠올랐다. 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사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번에 새 부서로 옮기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하는 느낌이라….”

“변화는 때로 좋은 기회가 되죠. 저도 파견 갔다 와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김현우는 점점 더 박 차장에 대해 알아갔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캠핑을 자주 간다고 했다. 아내는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다음에 저희 가족 캠핑 갈 때 김 부장님 가족도 초대할게요. 아이들끼리도 친해질 수 있고 좋을 것 같아요.”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우리 애들도 캠핑 좋아할 것 같아요.”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이번 점심시간은 단순한 식사 그 이상으로 회사에서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주에 중간 관리자 교육 있죠? 제 팀에서도 몇 명 참가하는데, 잘 부탁드려요.” 박 차장이 말했다.

“네, 좋은 교육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박 차장님 팀원들에게 특별 관리를 해드리죠.” 김현우가 웃으며 답했다.

김현우는 오늘의 일을 되돌아보았다. 위기일발로 복지위원회를 피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박 차장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 것이 더 큰 수확이었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 김현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비는 그쳤고,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마음도 하늘처럼 맑아진 것 같았다.

그의 컴퓨터 화면에는 다음 주 교육 자료가 열려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복지위원회 걱정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김 부장님, 잠시 괜찮으세요?”


젊은 직원 하나가 김현우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인가요?”

“지난번 신입사원 교육 때 해주신 말씀이 정말 도움이 됐어요. 혹시 개인적으로 조언을 더 구할 수 있을까요?” 김현우는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자리에 앉아요.”

젊은 직원에게 조언해 주면서, 김현우는 자신이 점점 더 이 역할에 익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예전에는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면서, 김현우는 이 부장을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다.

“김 부장,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위원회 일 좀 맡아줘. 너의 분석적이고 세밀한 관점이 필요해.”

김현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다음에는 한 번 고려해 볼게.”

이 부장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김현우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오늘 점심에 박 차장이랑 꽤 즐거워 보이던데. 둘이 친해진 거야?”


“응,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더라고. 앞으로 자주 만날 것 같아.”

“좋은 일이네. 조직에서 동맹군은 많을수록 좋잖아.”

이 부장의 말에 김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마. 그냥 좋은 상사 이자 직종 동료가 생긴 거지.”

“그래, 그래. 어쨌든 좋은 일이야. 내일 봐!”

이 부장은 손을 흔들며 떠났다. 김현우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김현우는 내일 있을 중간 관리자 교육 계획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제 복지위원회의 부담에서 벗어났으니, 온전히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으며 김현우는 미소 지었다. 때로는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오늘의 위기일발 상황이 새로운 우정으로 이어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


집으로 향하며,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수진에게 이야기해 줄 생각에 기대감이 생겼다. 아마 그녀도 함께 웃어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흘러가고 있다. 김현우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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