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그의 발표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회의실은 여러 부서에서 모인 중간 관리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 신입사원 교육과는 달리, 이번에는 회사에서 몇 년씩 경력을 쌓은 대리들과 과장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전달하는 것은 더 큰 도전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인사 교육부 김현우 부장입니다.”
김현우는 딱딱한 인사말로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실패 경험을 먼저 꺼냈다.
“5년 전, 저는 큰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습니다. 6개월간 준비한 제안서가 최종 단계에서 거절당했죠. 당시 저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리더십의 본질’은 바로 이런 실패 속에서 시작됩니다.”
청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누구나 실패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중간 직급인 부장이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예상치 못한 시작이었다.
김현우는 딱딱한 이론보다는 실제 사례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리더십의 다양한 형태, 위기 상황에서의 의사결정, 팀원들과의 효과적인 소통 방법까지. 모든 주제는 회사 내부에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상황들로 구성되었다.
“여러분, 진정한 리더십은 권위에서 나오는 걸까요? 저는 신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뢰는 솔직함, 일관성, 그리고 진정성을 통해 쌓이는 것입니다.”
김현우는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몇은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박 차장 팀의 직원들은 특히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시간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김현우는 놀랐다. 평소의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여러 명의 질문이 이어졌다. 중간 관리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던 모양이었다.
“김 부장님,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중재할 수 있을까요?”
“팀원들 사이에 성과 차이가 클 때, 어떻게 공정하게 평가하면서도 모두의 사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김현우는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그의 솔직함과 진정성이 청중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교육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서자, 최 이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부장,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요. 다들 호평입니다.”
김현우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준비한 내용이 도움이 됐다면 기쁘네요.”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어요. 특히 자신의 실패 경험을 나눠주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 이사의 칭찬에 김현우는 쑥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만족감도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 부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김현우가 돌아보니, 마케팅 부서의 이 대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회사에서 유망한 젊은 인재로 알려져 있었다.
“네, 물론이죠. 무슨 일인가요?”
“오늘 발표 내용 중에 실패를 대하는 방법에 관한 부분이 정말 와닿았어요. 사실 저도 최근에 큰 실패를 경험했거든요….”
이 대리의 목소리에 불안과 좌절감이 느껴졌다. 김현우는 그녀가 자신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근처 카페에서 잠시 이야기 나눌까요?”
회사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이 대리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담당했던 신제품 마케팅 캠페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상사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신감은 심하게 흔들려 있었다.
“부장님처럼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지금은 매일 회사 오는 게 두려워요.”
김현우는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었다.
“이 대리님,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중요한 건 그 후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죠. 저도 그때 몇 달간 자책하고 괴로워했어요. 하지만 결국 깨달은 건, 실패는 결과일 뿐 나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이 대리의 눈에 조금씩 희망의 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를 하셨으면 해요. 첫째, 무엇이 잘못됐는지 냉정하게 분석하세요. 감정적 판단이 아닌 객관적 분석이요. 둘째,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와도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계획을 세우세요. 이것이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이 대리는 열심히 메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장님. 다시 용기를 내볼게요.”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카페를 나서며, 김현우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성찰이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인가?’
김현우는 지금까지 주로 업무 처리와 프로젝트 관리에 집중해 왔다. 오늘처럼 다른 사람의 성장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순간들은 드물었다. 그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발령으로 교육 부서에 오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동안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재능과 열정이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김현우의 책상 위에는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박 차장이 남긴 메모였다.
“오늘 교육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 팀원들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하네요. 다음 주 중으로 식사 한번 해요. - 박”
김현우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조직 내에서 진정한 동료가 생겼고 자신의 일이 가치 있게 느껴진다는 이중의 기쁨이었다.
그날 저녁, 김현우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오늘의 경험을 차분히 정리하고 싶었다.
‘오늘의 교육은 내게도 큰 배움의 시간이었다.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도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경험한 실패와 좌절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김현우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열정의 목소리였다.
‘나는 항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 실수 없이, 빈틈없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와 기쁨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 대리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가치를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글을 쓰다 보니, 김현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길과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일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것.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이것이 아닐까?’
깨달음은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대감도 컸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찍 왔네. 오늘 발표는 어땠어?”
수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좋았어. 반응도 좋았고, 나 자신도 많은 걸 느꼈어.”
“그래? 무슨 느낌이 들었는데?”
김현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말로 옮기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글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뭔지,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뭔지 조금 알게 된 것 같아.”
“난 항상 실수 없이 일을 잘하는 데 집중해 왔어. 그게 내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오늘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는 걸 돕는 과정에서, 내가 진짜 기쁨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어.”
수진이 말을 이어갔다. “그게 오빠 본래 모습인 것 같아. 아이들한테도 항상 그랬잖아. 민우가 수학 문제 풀 때나, 지은이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오빤 항상 인내심을 갖고 도와줬어.”
김현우는 놀랐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일관된 패턴을 수진이 짚어준 것이다.
“정말 그랬네…. 내가 몰랐어.”
“오빤 항상 그랬어. 다만 직장에서는 그런 면을 발휘할 기회가 적었던 것 같아. 이번 발령이 어쩌면 오빠에게 딱 맞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김현우는 수진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는 항상 그의 본질을 잘 알아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수진이 물었다.
“글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하지만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교육 프로그램을 더 발전시키고, 멘토링 프로그램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야.”
“좋은 생각이네.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 같아 기뻐.”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진정한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깨달음은 앞으로 그의 직업적 여정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김현우는 내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멘토링 프로그램 계획서 작성, 다음 교육 내용 구상, 이 대리와의 후속 미팅 약속. 모든 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