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김현우는 눈을 떴다. 평소라면 몇 분이라도 더 누워있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이 그를 완전히 깨웠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 김현우는 어젯밤 구상했던 멘토링 프로그램의 개요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성장의 사다리(Growth Ladder)’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은 회사 내 다양한 직급과 부서의 직원들을 연결해 지속적인 성장과 학습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모든 직원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동시에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
김현우는 이 문장을 프로그램의 핵심 철학으로 적었다. 그동안 회사 내에서는 공식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일상적인 업무 환경에서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문화는 부족했다. 이 프로그램이 그 틈새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작업한 결과, 기본 구조와 운영 방안이 담긴 초안이 완성되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수진이 서재로 들어오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응,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좀 정리하고 있었어.”
“무슨 아이디어인데 그렇게 신이 났어?”
김현우는 자신의 멘토링 프로그램 계획을 설명했다. 예전과 달리, 그의 목소리에 열정이 가득했다.
“좋은 생각인데! 직원들이 서로 배우고 성장할 기회가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해? 아직 초안이라 더 다듬어야 하지만, 최 이사님께 오늘 제안해 볼 생각이야.”
“오빤 할 수 있어. 그 열정이면 분명 설득할 수 있을 거야.”
김현우는 수진의 믿음에 고마웠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김현우는 최 이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다행히 최 이사는 오전에 시간이 있었고, 김현우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성장의 사다리’라…. 흥미로운 이름이네요.” 최 이사가 제안서를 훑어보며 말했다.
“네, 모든 직원이 서로에게 배움과 가르침을 주고받는 사다리처럼 연결되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김현우는 차분하게 프로그램의 구조와 기대 효과를 설명했다. 정식 멘토-멘티 관계 설정, 분기별 목표 설정과 평가, 그리고 성공 사례 공유를 통한 문화 확산까지. 그의 설명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했다.
“사실 요즘 직원들의 소속감과 성장 기회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어서 고민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최 이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기쁩니다. 소규모 파일럿으로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면 어떨까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다음 주 임원 회의에서 이 안건을 가지고 가볼게요. 김 부장님이 직접 발표해 주시면 더 좋겠네요.”
“영광입니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현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최 이사의 긍정적인 반응은 큰 용기가 되었다.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현우는 메일함을 확인했다. 어제 상담해 준 이 대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 부장님, 어제 조언 감사합니다. 부장님 말씀대로 제 실패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니 몇 가지 개선점이 보이더군요. 덕분에 새로운 접근법으로 프로젝트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 되실 때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첨부파일로 새 기획안을 보내드립니다.]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첨부파일을 열었다. 이 대리의 새 기획안은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훨씬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구체적인 피드백을 적어 회신했다.
[이 대리님, 기획안 잘 봤습니다. 이전 접근법에서 크게 개선된 모습이 보이네요. 특히 대상 고객층에 대한 분석이 훨씬 정교해졌습니다. 몇 가지 제안하자면….]
메일을 보내고 나서, 김현우는 문득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이토록 기쁨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점심시간, 김현우는 박 차장과 약속한 식사를 위해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박 차장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셨어요? 죄송합니다.” 김현우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오늘 표정이 밝아 보이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김현우는 멘토링 프로그램 아이디어와 최 이사의 긍정적인 반응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차장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응원해 주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저희 팀에도 적용하고 싶네요. 사실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요. 팀원들의 성장 속도가 다 다른데, 개인별로 맞춤 지도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죠. 직책자 혼자서는 모든 팀원을 다 챙기기 어려워요. 그래서 팀원들끼리도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은 식사하며 멘토링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박 차장은 몇 가지 실용적인 제안을 해주었고, 김현우는 그것을 메모했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다른 회사들도 벤치마킹하게 될 거예요. 김 부장님이 혁신가가 되시는 거죠.” 박 차장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과찬이세요. 그저 직원들이 더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그 진심이 통할 거예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그는 새로운 부서로의 이동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저항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멘토링 프로그램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김현우는 자신의 경험과 회사의 현재 상황, 그리고 미래 비전을 연결시켰다.
발표 자료를 검토하던 중, 김현우의 전화기가 울렸다. 신임 사장인 박지연 사장이었다.
“김 부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제 사무실로 와주시겠어요?”
김현우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곧 가겠습니다.”
사장실로 향하는 동안, 김현우는 왜 자신을 부르는지 궁금했다. 혹시 멘토링 프로그램 이야기가 벌써 사장에게까지 전해진 것일까?
“안녕하세요, 김 부장님. 앉으세요.” 박 사장이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네, 최 이사로부터 멘토링 프로그램 제안에 대해 들었어요. 아이디어가 정말 좋더군요.”
김현우는 놀랐다. 최 이사가 이렇게 빨리 사장에게 보고했다니.
“감사합니다. 아직 초기 단계라 더 다듬어야 합니다.”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이런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우리 회사에 필요한 거예요. 사실 저도 취임하면서 회사 문화를 좀 더 활기차고 성장 지향적으로 바꾸고 싶었거든요.”
김현우는 박 사장의 진심 어린 열정에 감동했다. 그녀의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다.’라는 말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음을 느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요.” 박 사장이 말을 이었다. “이 멘토링 프로그램을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그치지 말고, 회사 문화 혁신의 일환으로 더 크게 발전시켜 보는 게 어떨까요? ‘Growth Culture Project(성장 문화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김현우의 눈이 커졌다.
“김 부장님이 리드하셨으면 해요. 물론 교육 부서의 업무와 병행하는 건 부담될 수 있으니, TF팀을 구성해 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큰 책임이자 기회였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회사 차원에서 펼칠 수 있는 기회.
“영광입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임원 회의에서 발표해 주세요. 제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온 김현우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작은 아이디어가 회사 전체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프로젝트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던 길이었을까?’
김현우는 자신의 진로 여정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 모든 과정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성실하게 일해 온 경험, 실패와 좌절의 순간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교훈들. 이 모든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퇴근길, 김현우는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내일부터는 더 많은 준비와 도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김현우는 창밖의 도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빌딩 사이로 비치는 노을의 색채,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
‘나는 항상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내 강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세한 것을 보는 눈,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의 핵심이라 다행이었다.’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작은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앞으로 더 큰 파도를 만들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