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회의실은 평소보다 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회사의 모든 임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김현우는 발표를 위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지만, 준비한 발표 자료는 거의 보지 않았다. 이미 모든 내용은 그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 교육부 김현우 부장입니다. 오늘 제가 제안드릴 ‘Growth Culture Initiative’, 즉 ‘성장 문화 이니셔티브’는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닌, 우리 회사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김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과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첫 슬라이드를 넘겼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모든 직원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동시에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철학에 기반합니다. 우리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인 성장과 학습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입니다.”
임원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무관심해 보이던 몇몇 임원들도 이제는 김현우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계속해서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멘토링 시스템 구축, 부서 간 교류 프로그램, 성공 사례 공유 플랫폼, 리더십 개발 트랙 등. 모든 요소는 철저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김현우는 다섯 가지 핵심 효과를 강조했다. 직원 만족도 향상, 인재 유출 방지, 내부 역량 강화, 부서 간 협업 증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회사 성과 향상. 각각의 효과에 대해 그는 구체적인 사례와 데이터를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가 왜 지금 우리 회사에 필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임원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시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비전, 그리고 새로운 도전들. 이런 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문화입니다. 한 사람의 천재보다,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백 명의 직원들이 더 큰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발표를 마치자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박지연 사장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내 다른 임원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매우 인상적인 발표였습니다, 김 부장님.” 박 사장이 말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들어볼까요?”
다양한 의견과 질문들이 오갔다. 일부 임원들은 예산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 이들은 실행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김현우는 모든 질문에 차분하게 답변했다. 그는 이미 예상 가능한 반대 의견들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해 두었다. 그의 답변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으며, 회사의 비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침내 박 사장이 최종 발언을 했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니, 이 프로젝트는 진행할 가치가 충분해 보입니다. 김 부장님이 제안한 태스크포스 구성을 승인하겠습니다. 예산 문제는 재무팀과 추가 논의하고, 두 달 후 중간 평가를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김 부장님, 이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아주시겠어요?”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을 나오면서, 여러 임원들이 김현우에게 축하와 응원의 말을 건넸다.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해왔지만, 오늘처럼 많은 임원들로부터 인정받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최 이사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훌륭했어요, 김 부장님.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은 처음 봤어요.”
김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사실 저도 제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새롭네요.”
“그 프로젝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은 배우는 동시에 가르칠 수 있죠. 당신이 그 좋은 예입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로운 역할을 배우면서, 동시에 회사에 새로운 가치를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최 이사의 말에 김현우는 깊이 공감했다. 그 역시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여러 동료들이 발표 소식을 듣고 축하해 주었다. 특히 박 차장은 커피 두 잔을 들고 찾아왔다.
“들었어요, 축하합니다! 발표가 대성공이었다면서요?”
김현우는 쑥스럽게 웃었다. “과찬이에요. 아직 시작일 뿐이죠. 앞으로가 더 중요해요.”
“벌써 태스크포스 멤버로 지원하고 싶은 직원들이 많대요. 특히 젊은 직원들이 많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정말요? 그건 정말 좋은 소식인데요.”
박 차장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셨어요? 그동안 회사에서 이런 문화 혁신 프로젝트는 없었거든요.”
김현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제가 항상 세세한 것들에 집중하는 성향이 있어요.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예전에는 그게 단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최근에 깨달았어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과 변화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전체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한 거죠.”
박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무를 제대로 보는 눈이 있어야 숲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거죠.”
“정확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야기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보고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앞으로의 프로젝트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눴다. 박 차장은 여러 실용적인 제안을 해주었고, 김현우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오후, 김현우는 태스크포스 구성을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필요한 역할과 역량을 정의하고, 팀 구성안을 작성했다. 문득 그는 이 대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실패 경험과 그로부터의 회복 과정은 이 프로젝트에 큰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우는 이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리님, 시간 괜찮으세요? 제안드릴 게 있는데요.”
“네, 부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성장 문화 이니셔티브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는데, 태스크포스 멤버로 이 대리님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 대리님의 경험과 통찰력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 대리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말요? 영광입니다, 부장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요. 이 대리님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김현우는 다음 작업을 이어갔다. 태스크포스 킥오프 미팅 계획, 초기 6개월 로드맵, 성공 측정 지표 등. 그의 머릿속은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됐다. 김현우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중요한 프로젝트가 시작돼서.”
“축하해.”
“뭘, 이제 시작인걸.”
김현우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조금만 더 하고 갈게.”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밥은 챙겨 먹어."
전화를 끊고 김현우는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서울의 빌딩들은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도시의 수많은 빌딩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무를 보는 눈.’
김현우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세한 것에 집중하는 성향을 넘어, 개인의 가치와 잠재력을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보는 능력. 그것이 그의 강점이자, 이 프로젝트의 핵심 가치였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김현우는 마지막 문서를 저장하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오늘 하루는 길고 긴장되었지만, 그만큼 보람찬 날이었다. 그는 내일을 위해 충전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를 나서면서, 김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너머에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별들.
김현우는 문득 정우성이 생각났다. 그가 살아있다면 이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김현우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집에 도착해 조용히 문을 열자, 어두운 거실에서 잠든 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소파에서 기다리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김현우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여보, 일어나. 침대에서 자자.”
수진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왔구나. 엄청 늦었네.”
“미안해,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괜찮아. 프로젝트는?”
김현우는 수진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정말 잘 되고 있어. 내일 더 자세히 얘기해 줄게. 지금은 좀 쉬자.”
잠자리에 들면서, 김현우는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임원 회의에서의 발표, 동료들의 지지, 그리고 태스크포스 구성 작업까지. 모든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나는 지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그 확신은 그에게 편안한 잠을 선물했다. 내일은 또 다른 도전과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눈을 감으며, 김현우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을 붙잡았다.
‘나무를 보는 눈으로, 더 건강한 숲을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