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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by 석은별

친구들이 있다. 아니 있었다. 오래된, 정말 오래된 친구들.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툰 직장생활을 함께 나눴고 결혼과 육아의 초반을 함께 통과해 낸 친구들.... 우리는 다섯 명이었다.

우리가 낳은 아이들은 생일이 하루 차이 나거나 보름 차이 나거나 할 정도로 임신도 같이 한 사이다.

누군가는 ‘오공주’이라고 부를 만큼 끈끈한 그룹이었다. 거의 매달 한 번씩 모임은 당연하고 아이들이 어릴 땐 2~3일에 한 번씩 만나서 늘 함께했다. 단톡방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중에 H가 있다. 늘 중심에 서 있었고, 에너지가 넘쳤고, 말발도, 눈치도, 다 좋았다.

나는 그런 H가 좋기도 했고, 가끔 피곤하기도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보다도 피곤함이 먼저 밀려왔다.

H가 외도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다른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

나는 뒤늦게 그걸 듣고 당황했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응... 뭐, 걔 사정도 있잖아. 남편이 워낙 무심하대.”

“너무 책임감 없이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애들한텐 피해 안 가게 조심한대.”
“그냥 들어줘, 말 상대가 필요하대.”

그 순간 나는 어떤 거리감을 느꼈다. 이 사람들 사이에 내가 발붙이기 힘든 무언가가 생겼구나.

처음엔 그냥 ‘이해할 수 없다’ 고만 생각했다. 도덕적 잣대보다도, 그 상황을 ‘당연한 듯 넘어가는 분위기’가 불쾌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그다음이었다.

H가 남편에게 “은별이 만나러 간다”라고 말하고 실제로는 외도남을 만났다는 걸 그 남편이 연락 와서야 알게 됐다.

그날 저녁 나는 H에게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명랑했지만, 어딘가 서늘했다.

“야, 오늘 좀 불안했어. 내가 너 만나러 간다고 했다가 딴 데 간 거 남편이 눈치챈 것 같아. 혹시 나중에 물어보면 좀 맞춰줘. 너랑 카페 갔다고 해줘.”나는 침묵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조심스레 말했지만, H는 웃으며 넘겼다.

“아이, 알잖아. 남자 문제만 아니면 나 얼마나 의리 있는지. 걔랑 끝낼 거야, 진짜. 그냥 이번만 좀 도와줘.”


그날,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H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단톡방에서 반응이 없다고, 그날 일 이후 너무 멀어진다고.

“너 왜 이렇게 변했냐?”
“친구라면 이런 거 좀 덮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
“너 예전엔 안 그랬는데.”

나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내 이름을 팔아서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만드는 건 그 어떤 우정보다도 멀어지는 일이야.”

“... 그냥 한 번만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남편이 너라면 다 넘어가니까.”
“내가 뭐 부탁을 자주 해? 이번만 좀...”

“아니, H. 이게 한 번이 아닌 게 문제야. 그리고 너는 지금도, 내가 왜 싫은지를 모르는 것 같아.”


그날 밤, 단톡방에서 다른 친구들이 말했다. H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것이다.

“너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거잖아.”
“네가 그렇게 선 긋고 나가면 우리 뭐가 되니.”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이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에게 ‘불편한 정상’이 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늘 어딘가 불편했다. 농담의 수위가 과해도 웃어야 했고, 다른 친구의 뒷얘기가 오가도 적당히 맞장구쳐야 했고, 누군가 선을 넘는 말에도 ‘다 그런 거지’ 하며 넘겨야 했다.

그 불편함이, 그냥 오래된 관계라는 이유로 덮여왔을 뿐이다.

나는 단톡방을 나왔다. 별다른 말 없이. 알림도 꺼두었고, 그 이후로 연락도 받지 않았다.


조금 미안했다. 조금은 외로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편안했다.

매달 돌아오는 모임을 어떻게 핑계 댈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농담에 애써 웃지 않아도 되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다움을 잃기 쉬운 법이다.

나는 오랫동안 ‘관계 유지’라는 이름으로 나를 잃고 있었다.

요즘, 연락이 뜸해진 지인들의 목록을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넌 정말 그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고 싶니?”

내 대답은 갈수록 단순해진다.

“편안하다면 이어가고, 불편하다면 멈춰도 돼.”

관계를 끊는 게 관계를 망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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