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의 한 마디에 무너진 날

by 석은별

"또야?" 아이가 식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남편은 초록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큰 접시를 식탁 중앙에 놓았다. 바지락찜과 매운 오징어볶음. 해산물에 고추기름까지 휘날린 저녁.

"이건 내가 좋아하는 조합이야. 오늘은 진짜 제대로 만들었다." 남편은 뿌듯한 얼굴로 집게를 휘저었다.

나는 접시를 보며 조용히 물을 따랐고, 아이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나를 바라봤다.


"엄마, 닭은 왜 안 해? 요즘 아빠가 계속 이상한 거 하잖아. 난 닭 좋아하는데. 닭은 아예 안 하지?"

나는 잠시 멈칫했고,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옮겼다. 아이의 말이 못 들은 척 넘어가기엔 꽤 뾰족했다.

"엄마가 한마디 하면 되잖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이거, 나 안 먹을래."

그 말에 남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먹기 싫으면 먹지마. 니 엄마는 잘 먹잖아."

나는 입 안에서 뭔가 끓어올랐지만

"오늘은 그냥 조금만 먹자." 하고 얼버무렸다.

아이는 수저를 내려놓더니, 그 말을 꺼냈다.

“엄마는 왜 아빠같이 이기적인 사람이랑 결혼했어?”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정확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남편은 헛웃음을 지었고, 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술이 앙 다물어져 있었고, 눈빛은 억울하고 울컥한 감정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이 이 감정을 덜 아프게 할 수 있을지 그 자리에선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 시간은 거기서 끝이 났다.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남편은 씻으러 갔다. 식탁에는 해산물 잔해와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수저를 치우지도 않고, 물컵을 비우지도 못한 채. ‘왜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어?’ 그 말은 단지 남편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내 선택에 대한 질문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가족 안에서 감당해온 모든 침묵에 대한 반박이었다.


아이 입을 통해 들은 그 말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갈등을 피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며, 아이 앞에서는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고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아이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말하지 않는 걸, 그게 불편하고, 슬프고, 때로는 배신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아이는 엄마가 어떤 사람과 사는지를 보고 있었고, 엄마가 왜 말을 삼키는지도 느끼고 있었던 거다.


아이의 말은 상처였지만, 진실이었다.

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도 어떤 침묵을 가르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감정을 참는 엄마가 아니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엄마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아이 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아이의 몸은 이불 속에 말없이 누워 있었다.

"있잖아…" 나는 문득 목이 메었지만, 그 감정은 삼키지 않았다.

"엄마도, 사실… 가끔은 너무 참는 것 같아. 그치만 너한테는, 말해줘도 되겠지?"

어둠 속에서 아이의 이불이 움직였고,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나는 울고 싶었다. 아이는 내게 말해도 된다고, 이해해보겠다고 대답해줬다.

작은 사람이, 조용한 어둠 속에서 나를 안아준 셈이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밥상머리의 침묵은 언제부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