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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숨긴 채 웃고 있었던 나

by 석은별

“와, 너 진짜 밝다.”
“늘 웃고 있어서 좋다.”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마음은 점점 내려앉았다.

나는 웃는 데 능숙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고, 속이 상해도 괜찮다는 얼굴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오래된 습관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일’은 처음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표정이 어두우면 누군가가 예민하게 반응했고,

말수가 줄면 “왜 삐졌냐”, “분위기 흐리게 하냐”며 다그쳤다.

그래서 감정을 들키면 불편해진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서서히, 내 속을 감추는 게 관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이 되었다.

그렇게 웃는 게 ‘편한 사람’이 되었고, ‘기분 좋은 사람’,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한 사람이 되어갔다.


웃음은 표정을 만들지만, 슬픔은 눈빛을 바꾼다.

나는 거울을 보며 느꼈다.
내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그날따라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화장은 잘 먹지 않았고, 눈썹은 애써 그린 방향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날 따라 진심 없이 웃는 내가 스스로도 너무 뻔해 보여서 나조차 내 얼굴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도 웃는 게 낫잖아.”
“지금 분위기 깨기 싫어.”
“사실 나만 참으면 괜찮아지는 거니까.”

그랬다. 나는 내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우선해온 사람이었다.
분위기 조율자, 중재자, 적당히 유쾌한 사람.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누구도 조율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넌 지금 기분이 어때?”라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됐다. 그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묻지 않았다는 것.


나는 무표정한 얼굴이 어색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마치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준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웃었다.웃어야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았고, 화가 났는데 목소리가 떨렸고, 서운했는데 미소로 눙쳤다.

감정을 느끼는 속도가 표정을 따라잡지 못했다.


요즘은 가끔 그걸 멈춰보려고 한다.

딱히 웃고 싶지 않은 날엔 웃지 않으려 애쓴다.
진짜로 기분이 좋을 때만 웃음을 꺼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 표정을 조금 더 지켜보려고 한다.

기뻐서 웃는지, 불편해서 웃는지, 슬퍼서 웃는지, 그걸 구분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처음엔 어색했다. 내 진짜 얼굴이 낯설다.

근데, 그 낯설음이 싫지만은 않다.




얼마 전, 아주 사소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이가 갑자기 쥐고 있던 과자를 내 입에 쑥 넣어줬다.

“엄마, 그냥 먹어봐. 기분 좋아질걸.”
그러더니 자기가 먼저 껄껄 웃는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어떤 계산도 없이. 내 얼굴이 자연스럽게 풀렸고, 그 웃음이 어쩌면 오늘 하루를 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숨긴 채 웃는 삶은 조용히 사람을 지친다.

내가 괜찮아 보여야 모두가 편할 거라고 믿는 삶은, 결국 내가 나를 미루게 만든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웃는 사람이긴 하지만, 늘 웃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울다가 웃어도 괜찮고, 화가 나도 가만히 있어도 되고, 입꼬리가 내려가도 그 얼굴이 내 얼굴이면 된다.




이제는 진심 없이 웃던 날들을 조금씩 멈추고 싶다.

대신, 진짜 기분 좋은 날엔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싶다. 숨이 찰 정도로.그리고 누군가 내게 말했으면 좋겠다.

“은별아, 오늘 웃는 너는 진짜 기분 좋아 보인다.”

그때 나는 말할 거다.

“응. 오늘은 진짜, 기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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