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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도 명칭이 필요할 때

감정을 언어화한다는 것, 감정을 살아내기 위한 첫 구조화

by 석은별

감정은 흐른다. 때로는 말보다 빠르게, 때로는 몸보다 더 정직하게.

그러나 감정은 흐르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감정은 붙잡혀야 하고, 이름 붙여져야 하며, 무엇보다 이해 가능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 회차는 감정을 ‘이해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 그리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의 심리적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그 언어화가 자기 인식과 감정 리듬 회복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구조적으로 탐색해본다.


감정은 명명되기 전까지 ‘덩어리’에 가깝다

감정은 인지보다 먼저 도착한다. 몸의 감각으로, 표정의 미세 변화로, 혹은 침묵 속의 정적 같은 방식으로 먼저 존재한다.

그러나 명명되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서 정확히 붙잡히지 못한 덩어리로 남는다. 불안인지, 피로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채 몸과 마음을 동시에 흔들며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다니엘 시겔(Daniel Siegel)은 이를 “Name it to tame it”이라 표현했다. 즉, 감정은 이름 붙여져야 길들여질 수 있다.

감정은 명명되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으면 조절도 통합도 불가능해진다.


감정 명명의 심리적 기능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구분이나 분류가 아니다. 이는 감정과 자아의 관계를 복원하는 핵심 작업이다.

다음은 감정 명명이 갖는 세 가지 심리적 기능이다:

감정과 동일시에서 분리하기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는 표현은
“나는 분노 그 자체다”와는 다르다.
→ 명명은 감정과 자아를 분리해준다.

감정의 형태화 및 구조화
막연한 불쾌감이 “불안”으로 명명되는 순간,
감정은 모양을 갖는다.
→ 모양을 가진 감정은 다룰 수 있게 된다.

감정 리듬의 복원
감정이 이해될 수 있는 단위로 쪼개질 때,
감정의 흐름이 다시 안정된다.
→ 언어화는 감정 리듬의 조율 도구가 된다.


사례: “슬프다”는 말이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

상담실에서 자주 관찰되는 장면 중 하나는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묻는 질문 앞에서 길게 침묵하거나,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순간이다.

한 청년 내담자는 여러 회기를 거쳐도 여전히 “기분이 그냥 이상하다”고만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슬픈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슬프다고 말하는 순간, 내가 너무 약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순간, 상담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슬펐지만, 그 감정을 명명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은 무기력, 분노, 회피로 포장되었고 끝내 자신조차도 자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내몰았다.


감정 언어화는 ‘감정 지능’의 핵심

감정을 명확히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심리학에서 정서 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의 핵심 요소로 간주된다.

특히 피터 샐로베이(Peter Salovey)와 존 메이어(John Mayer)는 정서 지능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그 정보를 사고와 행동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이 정의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바로 감정의 명확한 명명이다.

자신의 감정을 모호하게 인식하거나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거나, 타인의 감정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높다.


감정 명명의 어휘력: 얼마나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감정을 명명하는 데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하다. 이는 단지 단어 수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결을 얼마나 미세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단어들은 모두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 / 고립감 / 소외감

분노 / 짜증 / 억울함

슬픔 / 상실감 / 허탈함

불안 / 초조함 / 긴장

이러한 감정 언어의 세분화는 자기 감정을 보다 정밀하게 인식하고, 자기 표현을 풍부하게 하며, 결국에는 더 건강한 관계를 가능케 한다.


감정 명명에 실패할 때 발생하는 문제

감정이 언어로 표현되지 않을 때, 무의식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한다:

신체 증상화: 두통, 위장 장애, 피로감 등으로 감정이 발현됨

과잉 반응: 감정이 아닌 방식(분노, 공격성)으로 감정 에너지 분출

회피와 동결: 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무감각 상태로 이탈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표현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 리듬이 언어화되지 않아 조율되지 못한 결과이다.


감정 명명을 위한 실천적 방법

감정 언어를 확장하고 구조화하기 위한 실천적 접근은 다음과 같다:

감정 일기 쓰기
하루의 사건보다 감정 중심으로 회고하는 글쓰기
→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때 내가 어떤 느낌이었는가?”

감정 단어 사전 만들기
자신이 자주 느끼는 감정을 10개 이상 리스트업하고 상황과 함께 기록해보는 연습

감정 명명 대화 연습
일상 속에서 “이건 ○○한 기분이야”라고 말해보는 시도
→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 리듬을 공유하는 첫걸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감정과 친해지는 일이다

감정은 이해받기 전까지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그저 흔들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은 자리를 잡고 나의 일부가 된다.

그 이름이 ‘불안’이든, ‘서운함’이든, 혹은 ‘기대감’이든, 그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우리는 감정의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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