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아프거나 힘들 때마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창작물에 기대어 살아왔다. 몸이 고장 나기 전, 마음이 허물어져 아프고 정신적으로 휘청거릴 때가 있었다. 그때는 시를 많이 찾았었다.
시인이 낳은 말들을 헤아리며 곱씹기보다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넘긴다. 마음에 착 붙는 문구를 발견하면 몸과 정신이 순간 일치되며 얼어붙듯 일시정지된다. 몇 초를 그렇게 꼼짝 못 하고 멈춰 서 있는다. 넘어져 다쳤었는데 보듬을 새도 없이 일하고 살았던 것인지, 덧나고 덧난 상처가 그제야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장 기관 어딘가가 신음하는 감각을 외면하지 않고 느끼고 있으면서 '아, 나는 여기가 아프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나를 위한 반창고 문구인 것이다. 그 문구가 내 안에 펼쳐지는 심상 속에 머물렀다가, 조금 익숙해지면 인덱스를 기록처럼 붙여둔 채 묵묵히 고개를 들고 다시 페이지를 넘겨나간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읽으면 다른 책을 읽고, 또 새 책을 사서 읽으면서 반창고 문구를 찾아 인덱스 붙여두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는 착각을 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책장에 앨범처럼 꽂혀있는 시집을 다시 꺼내볼 때가 있다. 페이지를 파라락 넘기며 덕지덕지 붙어있는 인덱스 문구를 되짚어 읽으려 하면, 내가 왜 이 문구에 감응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은 것이다.
무엇보다, 시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시인이 길어 올리고 빚어낸 말들에 도움을 입은 것이다. 그들이 느끼고 경험한 풍경들이 이름을 입고 언어의 형태를 갖춘 표현이 되어, 내 아픔의 실체를 알게 해 주고 그 증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덕지덕지 많기도 했지만, 아픔의 위치와 형태를 앎으로써 그곳에 반창고를 붙여줄 수 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를 읽어도 그때처럼 매달리는 심정이 되지 못한다. 두 눈이 서로 마주친 것처럼 가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멀리서 곁눈질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시를 좋아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별일도 아닌데 그런 생각 하나에 쓸쓸하고 외롭다. 나의 한 철을 내어준 대상을 다시 바라보았는데 무감한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아 헛헛하다. 인덱스들을 떼어 휴지통에 버리면 우수수 빠진 머리카락처럼 덧없고 서운하다. 사실 시어(詩語) 입장에서는 불현듯 찾아와서 말없이 떠난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낫고 싶다기보다는 그 말들과 같이 있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언가 반창고가 있어서 붙여서 나을 수만 있다면 이 몸의 병도 고쳐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