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2월 퇴원 후 26년 2월
머리카락은 체념의 시간만큼 너저분하게 길어져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도 역할도 없는 시간을 버티는 하루하루. 넋을 놓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덜 힘들 것이라는 내 무의식의 가르침은 어쩌면 다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밥때가 되면 잔여 전량을 감지할 수 없음에도 방전은 만들지 말자는 식으로 차려진 밥상을 깨작거렸다. 잘 때가 되면 못 잔 날의 컨디션 난조를 두려워하며 재깍재깍 불편한 잠을 청했다. 틈입해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외부의 치료적 도움이나 호의로 상관해 오는 사람들에 반응적으로 굴뿐, 나는 죽기도 전에 메마른 식물처럼 생기 없이 시들어있었다.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유일한 처세 같았던 넋 내려놓기란 것이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차츰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은 어떻게든 무뎌져갔기 때문이다. 째깍째깍 시간이 나를 두고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느끼는, 비생산적 순간에 불안을 느끼는 강박적 태도에서 서서히 놓이는 것 같았다. 물론 한편으로는, 돌아보니 지나있는 시간의 길이와 그에 상응하는 기억력 창고가 텅텅 비어있음에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회상하기 어렵고 달력만 대 여섯 장은 넘어간 시간의 길이만큼 머리카락은 숨 죽여 자라 있었다.
머리카락 자체에 대해서만은 기억이 또렷하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눈으로 손으로 경험하는 치료의 싸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진단 때의 '근치(根治)적 치료'를 위한 '세포독성 항암'과는 달리, 이번 진단은 남은 삶의 질을 위한 '완화치료'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한 번에 우수수 몽땅 빠졌다가 긴 시간에 거쳐 사람답게 다시 자라는 것과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번은 매일 조금씩, 주관적으로는 한 움큼 같은 반움큼이 계속 빠져나간다. 머리카락 뭉치를 매일, 게으르면 며칠에 한번 그 질감과 부피를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거울에 정수리를 비춰보는 내 모습. 정수리에는 풀 한 포기 없는 창백한 비포장도로가 나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는 반년이라는 시간만에 미용실에 갈 용기가 생겼다. 미용실에 가면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 아닌데도, 적어도 이 너저분함 정도는 해결될 것 같았을까. 용기란 진취적인 것만은 아닌, 마주할 자신이 없는 작은 불행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에너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나를 알지 못하는 미용실을 찾았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손님의 병증을 눈치채고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고민하는 헤어 디자이너의 마음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미용실에서 나는 마치 처음 치료받는 사람인 것처럼 굴 수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배려와 진심 어린 서비스를 받았다. 병이 보여준 처음 만난 사람의 선량한 민낯. 주치의의 냉랭한 진료보다도 정겨운 말들. 탈모샴푸를 사용하세요. 두유를 자주 드세요. 반년의 넋 놓음이 싹둑싹둑 상쾌하게 잘리고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해지기 시작할 무렵, 사선으로 비쳐오는 햇살 속에서 다시 느끼지 못할 것만 같았던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한 움큼 같은 귀중한 기분을 잘 쥐고 매만져본다. 잃어버리고 앞으로 잃어갈 머리카락 대신, 지금 잘 남아있고 다시 날지 모를 머리카락들을 예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