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영화 '버닝' 읽기
영화 버닝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들을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범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해미: 가벼움 속의 고통
해미는 가벼운 인물이다.
일용직 노동자로 카드빚에 시달리면서도
외모에 열중하여 성형수술로 얼굴을 갈아엎고,
남자들과 쉽게 잠자리를 갖는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는 그녀는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밀란 쿤데라의 관점에 따르면
그녀는 생의 가벼움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종수: 무거움 속의 방황
반면, 종수는 생의 무거움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그의 삶에는 부모와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
팍팍한 생계,
잘 안 풀리는 연애관계 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 와중에 종수는 소설가라는
다소 고독하고 무거운 직업까지 추구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늘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벤: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존재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 '벤'이라는 인물은
매우 미스터리하고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벤은 모든 일을 재미로 한다.
또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신기하다 말할 정도로
고통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대마초를 피우며, 늘 여유로운 웃음을 띤다.
쉽게 지루함을 느껴 연신 하품을 하기도 한다.
그는 법 위에 있다는 듯 굴며
범죄 행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벤은 유일하게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 인물들이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진지함과 가벼움의 충돌
벤은 종수가 매사에 너무 진지하다고 말하며,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벤의 말은 어려운 생계를 홀로 책임지는 와중에
재판 중인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쓰며,
해미와의 관계에서마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종수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살펴본 벤은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가벼움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현실 세계와 유리된 판타지적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벤의 무겁고 진지한,
또 절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일을 놀이처럼 대하는
그 여유로운 태도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흔히, 죽음만큼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온다고 한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 벤은 종수가 느꼈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느꼈는지도 모른다.
종수가 어째서 가벼워질 수 없었는지.
어떤 짐을 떠안고 생을 살아가야만 했는지를
그제야 이해했는지도.
결국 아무리 부자라 해도 슬픔을 유예할 수는 있을지언정,
생의 무게가 주는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평생 도망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 하다.
해미의 대사: 가벼움으로부터의 도피
해미는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된다 “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녀는 여느 또래 여성들처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용직을 전전하고 외모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치장하다 문득
그 의미 없는 처절함이 새삼 슬퍼지는 순간.
그러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람.”하며
맥이 빠지게 되었으리라.
그런 해미의 공허한 삶을
매섭게 쫓아오는 것은 카드빚뿐이다.
해미의 ‘우물’ 이야기: 특별한 서사에의 욕망
해미는 독특한 인물이다.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가볍지만은 않다.
해미의 가벼움은 무거움을 털어내기 위한
억지스러운 가벼움으로도 읽힌다.
영화 속 벤의 말에 따르면 해미는 친구도 없고
가족과도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돈은 한 푼도 없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해미는 늘 허허실실 웃어 왔다.
그녀는 그야말로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자신이 우물에 빠졌었으며,
종수에게 구출되었다고 말하는 해미의 말에서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해미는 자신과 종수의 만남이 우연적인 것이 아닌
운명적인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특별한 서사를 만들고 싶은
해미의 욕구에서 비롯한다.
우리도 사실 우리가 한 행동의 의도,
또는 사건을 부풀려서 말하거나
실제보다 더 멋진 것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선택과 인생이 무의미하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처럼
무언가 의미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해미는 생의 가벼움을 이겨내지 못한 채,
결국 ‘사라지고’ 만다.
삶에 필요한 적절한 무게,
자신을 현실에 발 딛게 해 줄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과는 정반대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종수와의 관계에서
가벼움을 덜어내고 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종수는 해미에게 ‘창녀 같다’고 표현하며
관습적 세계에서 결코 승인될 수 없는
해미의 처지를 일깨웠다.
의미 없는 존재들의 상징: 비닐하우스
“한국에는 비닐하우스들이 진짜 많아요.”
이것은 쓸모없고,
무가치한 인간 존재들이 이 땅에 많다는 메타포로도 읽힌다.
종수는
“그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건지는 형이 판단하는 거냐”라고 묻고,
벤은 “자기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벤에게 있어 쓸모없는 비닐하우스,
쓸모없는 인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다.
쓸모 있는 존재만이 인정받고
이 땅에 발을 붙일 자격이 있다는 이 위험천만한 생각은,
벤과 그의 친구들이 주최한 모임에서도 엿보인다.
벤에게 초대받은 모임에서 해미는
경계심 없이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으며 춤까지 선보인다.
그리고 의미를 갈구하는 해미의 처절하고도 진실된 몸짓은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벤과 그의 친구들이 보기에 해미는 가벼운 존재였다.
일용직을 전전하는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
아프리카 여행이나 떠나 반쯤 눈이 풀린 채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말하는 해미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싸구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관점에 따르면 해미를 비웃고 웃음거리로 삼는 이들이야말로 매우 저급한 것이며, 바로 ‘키치’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적절한 방식의 의미 추구라는 것이 존재한다.
좋은 관계,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경제력, 좋은 가족, 좋은 인격.
이것들을 지니기 위해 사람들은 노력한다.
나 또한 이런 것들을 추구하여
삶의 가벼움과 허무를 달래고자 움직이게 될 때도 있다.
결국 키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벤이 말하는 사라져
마땅한 비닐하우스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곤 한다.
해미의 춤: 의미를 갈구하는 몸짓
종수를 떠나기 직전,
해미는 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는데
그것은 의미, 삶의 무게를 갈구하는 처절한 절규로도 보인다.
그러나 해미의 이런 몸짓에 대해 종수는
“창녀 같다”라고 말하고,
해미는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종수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해미가 종수의 이 말을 듣고 떠난 것은,
그녀는 생의 가벼움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치면서도,
막상 옷을 마구 벗어던지는 것은
창녀나 하는 짓이라는 등의
관습에 부합하는 인간이 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땅바닥에 짓누르는 무거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실 해미의 이 같은 혼란은
이 시대 우리들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굉장히 잘 묘사하고 있다.
가벼움의 고통도 무거움의 고통도
모두 거부하고 싶은,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게 되는 청년들의 현실을.
종수의 살인과 나체: 무거움의 해체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믿으며,
벤을 죽인 종수는 옷을 벗어던지고 해미와 같은 나체가 된다.
창녀 같은 자만이 옷을 쉽게 벗는다고 말했던 종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며
처음으로 가벼워졌다.
이 장면은 무거웠던 종수가
무겁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기존 주류 체제를 상징하는 벤을 죽이는 일은
키치를 벗어던지는 상징적 행보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유일하게 가벼움과 무거움의 통합을 이루고
안식에 이르는 것은 종수이다.
영화는 종수가 이제 무겁지 않은 인간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버닝』의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 시대 청년들의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분노와 혼란을
어떻게 해소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이 답을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서 찾았다.
나를 옥죄는 ‘키치’를 버려야
나의 존재가 안식에 이룰 수 있다.
키치는 삶에 불필요한 무게를 더한다.
삶을 옥죄는 덫, 키치
키치를 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불필요한 무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의 무거움을 더해,
삶의 무의미와 공허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하겠지만,
키치에 얽매이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도’ 무거워진다.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한 미국의 상원의원이
잔디밭을 내달리는 4명의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노는 것을 보고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저런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 '사비나'는 그 말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 상원의원이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의 영혼을 읽었을까?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키치로부터의 탈출
결국 어떠한 것이 좋다, 어떠해야만 한다는 관습적, 획일적 생각은
자신과 타인을 모두 옥죄는 덫이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칼취업을 해야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완성해야 하고,
결혼을 했으면 이혼하지 않아야 하고,
완벽한 노후준비를 마치고 은퇴해야 하고,
그때에서야 여행을 다니며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에 주류적인 생각, 즉 키치이다.
반면 사회적 기준에 따른 의미 추구가 아니라,
자신만의 의미 추구는 적절한 수준의 무거움을
삶에 부여한다.
그것은 남이 보기에는 이상한 것일 수도,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을 덮쳐오는 키치에 때로는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내면의 키치를 불태우고,
자신만의 질서를 따라야 가볍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무거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는 가벼운 이들이라면,
자신의 삶에 키치적이지 않은 의미를 더하여
“가볍지 않은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가벼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는 무거운 이들이라면,
자신의 삶에서 키치를 덜어냄으로써
“무겁지 않은 인간”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삶의 고통과 슬픔이
늘 우리를 따라다니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삶이 무겁길 바라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길 바라고,
가볍길 바라면서도 또 너무 가볍진 않길 바란다.
결국 늘 불만족의 굴레 속에,
슬픔 속에 살아가는 일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렇게 적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라고 한다.
너무 멋진 말이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번을 곱씹어야 했다.
우리가 너무 가벼워서,
또는 너무 무거워서 삶의 슬픔을 느끼는 와중에도,
사실 그 내용은 행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조금 더 애정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