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덩어리가 전달하는 정서의 종류를 구별하고 이해하자.
어느새 작가가 된 지도 3년 째에 이르렀다.
그간 우여곡절을 거쳐
‘덩어리 글쓰기’라는 생각 틀을
내 나름대로 완성하고 나니,
이제는 읽는 일과 쓰는 일 모두에서
확연한 성장을 거두었음을 체감한다.
한 페이지의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 날,
이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글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은 주로 새로 계약한 소설 작업을 위해
닥치는 대로 소설을 뒤적이며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탐독하는 소설 외에도,
미팅 전 회사에서 레퍼런스로
꼭 읽고 와 달라 부탁한 소설책들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넉을 놓고 숙제처럼
독서를 해치우며,
‘재밌다, 재미없다, 이 작가 대단하다, 멋지다’
정도의 무의미한 감상만을
준비한 채 미팅 장소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덩어리 글쓰기라는 틀을 정립한 지금은
이 이야기들이 왜 좋거나 나쁜지,
이 작가의 무기는 무엇인지 빠르게 이해하며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미팅을 며칠 남겨두고,
읽어야 할 소설책 한 권을 손에 든 채
카페로 갔다.
시원한 카페라떼를 한모금 마신 뒤,
기대감을 품고 소설책을 펼쳤다.
벌써 여러 작품이 성공적으로 영화화 된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이었다.
세계의 독자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기성 작가의 시각과 나의 시각을
비교해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기대감이 들었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라는 소설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 안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위험한 일에 연루된 남편 때문에
생존의 위기에 봉착하며
어쩔 수 없이 삶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다소 과격한 살인이라는
방식을 활용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살기 위해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야만 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적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이기에,
결국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분명 이건 삶을 향한
긍정이 담겨 있는 좋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덩어리의 배치가
처음부터 중반까지
너무 느슨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캐릭터성과 극적인 서스펜스가
강한 소설부터
인물의 내면심리를 찬찬히 훑어가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읽다 보면,
아주 잘 배치된 이야기 덩어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면,
강한 쾌감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덩어리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치솟는다.
반면 어딘지 모나고 균일하지 않은
이야기 덩어리를 마주하거나,
애매하게 엮인 이야기 덩어리들을
보고 있을 때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 덩어리는 여기 배치했다면,
혹은 삭제하거나 다듬었다면
훨씬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아직 작가로서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훌륭한 소설을 완성한 적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적도 없는 풋내기 작가지만
‘이야기 덩어리 배치’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안목이 있다고 자부한다.
이야기에서 덩어리란
단순히 통일성 있는
내용의 집합은 아니다.
흔히 이야기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서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하나의 챕터로,
또 문단으로 구성된다.
대개 그 단위들은 주인공의 일상세계,
일상세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주인공의 좌절,
주인공의 회복과 성장, 악인과의 결투 등의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을 기준으로 나뉘곤 한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명확하고 쉽다는 장점이 있다.
1/5 지점에서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치고,
2/5 지점에서 주인공은 위기에서 벗어나
발버둥치고 하는 등의 공식에 따른다면,
독자에게 전달해야 할 정보를 적절한 순간에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괜찮은 것, 그 이상의
좋은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덩어리들은 변화라는 기준보다는
더 세밀하고 예리한 기준에 따라
분류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의 기준이 바로
이야기 덩어리가 전달하는 정서의 종류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야기 덩어리는
하나의 정서를 전달하는
이야기 내의 최소 단위이다.
각각의 덩어리들은
슬픔, 기쁨, 놀람, 그리움 등의
정서를 전달한다.
그 덩어리 정서들의 조화로운 합이
이야기의 전체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이들의 임무란
덩어리의 모양과 색채를
적절하게 결정해 빚어내고,
서로 다른 덩어리들을
유려하게 엮어내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과 독자들은
이야기 속에서 같은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서로 다른 감정을 느낀다.
또 같은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끼리도
각기 다른 정서를 느끼곤 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스스로가 어떤 정서를 전달하고자
의도하는가이다.
작가가 특정한 이야기 덩어리를 통해
연민이라는 정서를
독자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하기로 했다면
그는 그 덩어리가 연민이라는 확신을 지닌 채,
전체 이야기를 조망해야 한다.
이야기의 기본적 틀에 해당하는 발단부,
즉 위기가 닥치기 전의 일상세계에서도
주인공의 행동이나 모습은,
딱 한 가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분명 독자는 하나의 인물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인색하고 이기적인 주인공의
모습이 드러나면
혐오감을 느끼다가,
또 그가 억울하게 사회로부터
핍박 받고 소외 당하는 모습을 보면
연민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더욱 세분화된 기준을 가지고
이야기 덩어리들을 조립하다 보면,
이야기 내에서 전달되는 정서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며,
독자의 정서도 원하는 속도와 정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복합적인 인물이란 인상을
초반부에 남기고 싶다면,
‘연민’이란 덩어리와, ‘혐오감’이란 덩어리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씬을 각각 구상해
덩어리 엮기를 실행하면 된다.
‘덩어리 엮기’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로,
연민 덩어리와 혐오감 덩어리를
자연스럽게 엮는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상황’을 통해 연민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학대 받았고,
버림받았고 가난하다.
친구도 의지할 어른도 없이
성인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멸시한다.
밥벌이를 해야 하지만,
그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까지는 분명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이다.
이때 혐오감이란 덩어리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자 한다면,
인물의 ‘태도’를 이용해볼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이제 내 인생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바퀴벌레 같은 인생이나 살다 죽겠지.’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주인공이,
한발 더 나아가
타인의 성공을 전적인 운 때문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면,
연민의 정서를 느끼던 독자들은
점차적으로 혐오의 정서를 느끼게 될 것이다.
‘상황’을 통해 제시한 연민 덩어리에,
‘같은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태도’를
활용해 제시한 혐오감 덩어리를 엮었을 때,
상황이 인물의 태도를 포섭하고 있기에
더욱 자연스러운 덩어리 엮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듯,
각각의 덩어리들을 엮을 때는
둘 사이에 무언가 중첩되든,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섭하든
하는 것이 매끄럽다.
특정한 정서를 담은 덩어리 다음에
어떤 덩어리를 엮을 것인가는
이야기의 종류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가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에 따라,
슬픔의 정서 다음에 곧바로
더 깊은 슬픔이 등장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슬픔 다음에 기쁨이라는 정서를 전달해
독자들이 극적인 재미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이처럼 덩어리 배치를 통해
이야기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으며,
이 배치가 몸에 익으면,
본능적으로 이 덩어리의 크기나 길이,
모양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원래 시놉시스 단계에서 결정해 두었던
이야기의 세부 단위는
정서들이 엮여가는 과정에서
더욱 적절한 길이나 모양으로
유연하게 변화하기도 한다.
경험적으로는 이야기가 고조되어 흔히,
‘승’에 해당하는 구간으로 향할 수록
대립되는 정서를 반복적으로 번갈아가며 엮는 것이
효과적이라 본다.
예를 들면, 기쁨과 슬픔,
놀람과 안정,
그리움과 불안감 등의 조합이다.
이때 독자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빠르게 전환되는 정서를 체험하며,
빠른 호흡으로 이야기를 읽어 나가게 된다.
반면, 결말부는
하나의 통일된 정서를 켜켜이 쌓아 올려,
정서를 고조시키는 것이 좋다.
정서의 빠른 전환은
모든 갈등과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정리되는 시점의 결말부를
오히려 어수선하게 만든다.
만약 상실감과 기쁨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만들기 위해,
하나의 정서만을 파고 들 수 없다면,
덩어리를 길게 늘어뜨려
정서를 천천히
전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말부에서는 정서가 전환되더라도
차분히 하나의 정서를 진득하게 전달해준 뒤
다음 정서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독자는 하나의 큰 덩어리화가 된 책을 본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덩어리 조각들을 레고 블럭을 쌓듯,
부수고 쌓길 반복하며
하나하나 조립해 나가야 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의 이야기를 쪼개
작은 덩어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독서할 때에,
이 작가가 몇 페이지의 이야기 덩어리로
어떤 정서를 전하고자 하는지 느껴보는 것이
덩어리 글쓰기의 연습이자 출발점이다.
@온달
앨범 <태양의 풍속> 작사, 작곡, 노래
앨범 <Like stars> 작사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진스토리작가 당선
네이버 웹툰 <이번 생은 케이팝 리벤지> 스토리 작가
종이책 소설 1권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