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근데 계획 없이 아주 잘 삽니다.
작년 12월, 지금까지의 20대를 되돌아보니 계획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솝트, 디자인, 회장, 마케팅... 대학 입학 때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해왔다. 고등학생 때까지 진로를 설계하고 원하는 직업을 구체화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터라, 마음 한편에 계획대로 살지 않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들어앉아 있었다.
올해 명확하게 느끼는 바로는, 계획이 없어도 괜찮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좋다. 때로는 계획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계획은 미래의 내가 있을 곳을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나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세우기 때문이다.
계획 없지만 잘 살아온 지난 4년을 기록해 본다.
고등학생 때 대입을 준비하면서는 대학에 가서 미디어 분야를 공부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아리 활동 및 독서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미디어학도로서 세상 사람들의 소통으로 세상을 바꿔놓겠다는 푸른 꿈을 꾸었다.
세상의 변화라는 이상 가득 품고 입학한 대학 생활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고, 나는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고등학교 선배가 내게 추천해 준 것이 바로 솝트(SOPT)다. 선배의 사촌이 이 동아리 활동으로 많이 배우고 취업까지 했다면서 추천해 줬다.
IT창업 동아리라니 정말 신기했다. 기획, 디자인, 안드로이드, iOS, 서버파트 중 기획파트에 눈이 갔다. 마음 한 구석에 창업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에,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7,000자 가까이 되는 지원서를 꾸역꾸역 채워 제출했다. (이 스무 살은 2년 뒤, 지원서 수 백 장을 직접 채점합니다)
서류 평가 통과 후 면접은 연세대 창업지원단에서 봤는데, 가서 아이스브레이킹 할 때부터 형누나들이 굉장히 신기해했던 기억이 아직 난다. 스무 살이 솝트를 어떻게 알고 왔냐고, 벌써부터 이런 활동을 하냐며 놀라워했다.
총 1시간가량 진행된 면접은 잘 봤다고 생각했고, 붙었다.
그 후 솝트 25기 OT가 진행된 2019년 9월 25일은 아직까지 내 인생 가장 중요한 하루다.
그렇게 나는 미디어 전공을 놓고 IT창업 세계에 들어섰다.
짜릿하게 활동했던 솝트 25기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는 6차 세미나다.
참고)
솝트 6차 세미나에서는 기획파트와 디자인파트의 합동 세미나가 진행된다.
PM은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기획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UX 설계와 시각화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디자이너는 PM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기능을 보태고 화면을 설계하는 경험을 쌓는다.
당시 디자인 툴을 쓸 줄 몰랐던 나는 종이 위에 연필로 와이어프레임을 직접 그려서 가져갔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때의 가장 순수한 열정이지 않았나 싶다.
디자이너와의 실습 전, 디자인파트장 님이 기획파트 회원들에게 디자이너와 UX 디자인에 대해 짧은 세미나를 진행해 주셨다. 바로 이 시간이 내가 UX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당시 이 한 문장이 아주 인상 깊게 다가왔다. 세상에 불만 가득한 때여서 더욱 그랬던 듯하다.
그렇게 나는 UX 디자인을 공부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던 2020년 상반기는 집에서 학교 수업만 들으며 지냈다. 그 해 하반기에 UX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2021년 상반기까지 1년 동안, 솝트 디자인파트 세미나를 듣고 해커톤 4번과 프로젝트 1번에 참여하며 UX 디자인을 학습했다.
지금 복기해 보면,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새로운 시선에서 UX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디자인 툴 피그마와, 피그마를 활용한 컴포넌트 및 디자인 시스템 제작에 큰 재미를 붙여서 깊이 학습했었다. '솝트는 피그마를 판다' 스터디를 3기 동안 운영하며 피그마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직접 강의하고 자료를 정리해주기도 했다.
2021년 여름, 솝트 활동으로 꽉 찬 내 캘린더를 보면서 이 동아리의 회장이 되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의 자세한 마음은 생략. 활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어 몰입하는 솝트 활동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제일 큰 IT창업 동아리의 역대 최연소 회장이 되었다.
이 글에서 회장으로서 어떤 신념으로 동아리를 이끌었는지는 자세히 적지 않겠다. 너무 길어진다. 회장 활동에 대한 회고는 충분히 했고, 나중에 쓰고 싶어지면 쓰겠다. 이 또한 계획하지 않는다!
회장 활동이 끝난 후인 작년 상반기는 의도적으로 쉬어가는 때로 잡았다. 2년 동안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던 터라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던 때이기도 했다.
여름 방학 시즌이 되어 복학을 고민하던 찰나, 솝트 25기에서 만나 알고 있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퍼포먼스 마케터로 함께할 주니어를 구하고 있어. 해볼래?'
갑자기 직장 생활, 심지어 인턴도 아닌 풀타임 제안이었다. 게다가 마케터라니.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직업이다. 그럼에도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여럿 있다.
1. 전환이 필요했다. 복학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2. 솝트에서 프로덕트는 많이 만들어보았으니, 마케팅으로도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3.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
4. 가장 결정적으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다음 해에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다. 큰 계획 없이 살았다.
계획 없이 살라는 말이 대책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라는 뜻은 아니다.
오늘을 충분히 의미 있게 보내되, 내가 잡을 수 있는 우연을 꽉 잡으라는 말이다.
올해는 나는 23살의 내가 몰랐던 무엇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