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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은의 리뷰닷 May 08. 2019

매클루언의 재구성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을 읽고 

데카르트 그리고 매클루언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었던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밖으로 확장했던 유일한 동물이고, 그것이 언어를 통해서 안정적으로 개체에서 개체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구의 이용과 함께 나타났을) 언어는 인간의 첫 번째 ‘확장'이었다. 그 확장을 좀더 체계화된 형태로 공유될 수 있도록 한 것이 문자였으며 인류는 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술 발명과 함께 또 한 차례 혁명적인 변화를 맞닥뜨렸다. 


글꼴 리드 세트 활판 인쇄술 (사진 : Pixabay)


인쇄술과 함께 종교에서 해방되었던 과학과 철학은 한 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두 갈래의 접근 - 경험론과 합리론 - 모두 극한의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위기의 순간 르네 데카르트가 나섰다. 그는 의심을 거듭해도 부정할 수 없는 ‘생각하는 존재’를 정립했고, 그로부터 학문의 대상이 되는 물질계를 긍정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정립했다. 데카르트는 물질계를 ‘연장’, 또는 ‘확장’이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는 ‘extention’ 으로 보았다. 그는 물질계의 ‘속성’을 그렇게 본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속도’의 ‘확장’을 촉발시킨 장본인이었다. 


우리의 눈이 볼 수 있는 범위는 분자에서 원자,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쿼크에까지 이르렀고, 우리의 손은 지구 밖은 물론 외계탐사선을 통해 명왕성 건너편에 이르렀다. 우리는 소리보다 빨리 날 수 있으며 생명의 신비가 코딩된 유전자를 조작해 전혀 새로운 생명을 실험실에서 창조할 수 있다. 


매클루언은 이러한 ‘문명의 역사’ 혹은 ‘과학사’를 미디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에게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채널(Channel)’이 아니라 인간이 접촉하고 이용하는 세계 전체이다.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이라는 책은 분류가 애매하다.  철학책도 아니고,  사회과학 서적도 아니며 연구논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필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매우 거칠고 문학적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이론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정의와 논증보다는 분절적인 ‘선언’이 난무하며 칼춤을 추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상 이쪽 저쪽을 무작위로 찌르고 벤다. 그러나 그의 책은 성서 안에 담긴 ‘예언서'처럼 어떤 시점(View point)을 제시하고 있다. 가능성을 담은 생각의 씨았을 무작위로 뿌려놓은 것 같다. 


이 글은 먼저 매클루언이 말하는 ‘미디어'라는 개념을 살펴보고, 두 번째로 그가 말하는 ‘전기 기술'의 특성과 ‘네트워크’를 비교해 본 뒤, 마지막으로 ‘중추신경 체계를 몸 밖의 전기 기술 속에 내놓아 버린'(p.116)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매클루언이 말하는 ‘미디어'


매클루언이 말하는 ‘미디어'는 ‘인간 밖에 있는 것’, 그리고 ‘인간을 매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미디어'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매클루언이 사용하는 ‘미디어'는 월신 더 넓은 개념이다. 즉 미디어는 ‘우리가 미디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것'(p.112)으로 ‘인간의 신체가 접촉(안경의 경우처럼 신체접촉은 아니지만 우리의 시선이 닿는 경우까지 포함해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매클루언은 거래의 매개인 ‘화폐’역시 “감각 생활들의 확장"(p.52)으로 분류한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가 세계는 대상화되고 ‘세계 일반’을 인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오해다. 매클루언은 미디어와 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디어인 도끼'를 예로 들면서, “선교사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에게 쇠도끼를 가져다주었을 때 돌도끼에 기초를 둔 원주민들의 문화는 붕괴했다.”(p.63)는 사실을 적시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오스트레일리아_원주민


다시말해 매클루언에게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기도 하지만, 이 때의 ‘확장’은 ‘존재의 변화’를 수반하는 확장이다. 이 ‘변화’와 관련해 살펴보면 “기계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사회가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야만"(p.64)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고, 한 사회의 변화는 “폭발적 방출"(p.149)의 형태로 다른 사회의 변화를 촉발하기 때문에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예를 들어 “도로와 교통수단의 개선은 이전의 낡은 패턴을 반전시켜 도시는 노동의 중심지로, 시골은 레저와 오락의 중심지로 만들었다.”(p.91) 이렇게 보면 ‘미디어’는 도구가 아니라 세포 안으로 들어온 미트콘드리아나 엽록소처럼 더 큰 ‘확장’으로 품어지게 되는 인간 존재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형태'로 볼 때, 꼭 단선적인 것은 아니다. 전기 기술은 “시각적인 눈의 인간을 끊임없는 친족적 유대의 그물망과 상호 의존성을 바탕으로 하는 부족적이고 구술적인 패턴으로 되돌리는 번역”(p.113)을 하기도 하고, 텔레비전은 ‘고대의 원형극장을 대중에게 되돌려주었다.’(p.118) 젊은 시인들을 공원으로 불러내 시를 낭송하게 만들기도 했다.(p.119)  


매클루언이 말하는 ‘핫 미디어’, ‘쿨 미디어'의 구분은 미디어가 인간 존재를 확장시키는 데 있어 얼마나 밀도가 높은가를 구분하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p.60) 다시 말해 그 구분에 목을 맬 필요가 전혀 없다. 


세계 전체인 미디어를 ‘핫’과 ‘쿨’로 나누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는 ‘핫 미디어'를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라고 정의한다. 효과이론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미디어를 영향을 전달하는 ‘통로(channel)’ 정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매클루언의 접근법은 분명히 다르다. 


요약하자면, 매클루언의 관점에서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나 채널이 아니며, 인간 존재의 확장이고 ‘미디어’와 함께 확장된 인간은 확장을 겪기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미디어인 원자폭탄’을 가진 인간은 (원자폭탄은 이른바 ‘공포의 균형' 효과 - 커뮤니케이션 해서 - 안전보장이사회를 탄생시켰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곳은 모두 원자폭탄을 보유한 나라이다.)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르다.   




궁극적인 미디어 ‘전기 기술' 


앞서 우리는 매클루언이 말하는 ‘미디어’를 살펴봤다. 그런데 그의 책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미디어는 TV나 Radio가 아니다. 이 책은 1964년대에 초판이 나왔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전기 기술'이 앞으로 인간 존재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놓을 것임을 예견한다. 


그에게 전기는 인간에게 “총체적이고 급진적이고, 전면적이며 또한 탈집중적"인 메시지이다.(p.33) 이 말은 전기라는 ‘미디어'는 인간을 “총체적이고 급진적이고, 전면적이며 또한 탈집중적”으로 확장시킨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매클루언에 따르면, “전력은 어떤 장소든 중심이 되게”(p.87)하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농가에서나 중역의 사무실에서나 똑같이 전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매클루언에 따르면, “전력은 어떤 장소든 중심이 되게”하는 힘이 있다. (사진 pixabay)


매클루언은 우리가 미디어를 파악할 때 미디어를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하는 것을 강도높게 비판하는데 (p.51 심지어 그는 ‘내용'이란 말을 “도둑이 집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부가 부족해 또 다른 맥락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기에 대해 “내용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정보"라는 찬사를 보낸다.(p.118) 즉, “전깃불의 메시지는 총체적인 변화"인 것이다. 


왜 매클루언은 전기를 이토록 중요한 ‘미디어’(매클루언이 말하는)의 자리에 놓는가? 


매클루언이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는 아니었지만, 공간(x,y,z의 3차원)에 갇힌 인간존재를 해방시켜 ‘동시성'을 구현하는 새로운 차원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이를테면 ‘차원이 다른 미디어’라는 점을 매클루언은 미리 발견하고 주목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전기'라는 미디어가 매개하면서 나타난 ‘네트워크'는 ‘공간’ - 거리 -으로 한계지워진 지구라는 3차원 공간을 초월한다. 즉 ‘거리’(공간)을 뛰어넘는 동시성을 부여했다.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전기는 동시에 우리가 ‘보는 것'의 차원을 바꿔놓았다.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를 우리는 넘어선다. 즉 빛(전자기파)이 도달하는 속도를 이용해 시간이 시작된 빅뱅 직후의 빛을 관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던 그대로인 공간은 확장된 존재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된다. 


별들은 너무나 크고/ 지구는 너무나 작구나 / 우리가 보던 그대로인데도. (p.85) 




네트워크, 그리고 ‘중추신경 체계를 내놓은’ 인간 


읽기에 따라서 그의 책은 이른바 ‘싱귤래리티(Technological singularity)’는 물론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예견한 책으로 보일 수 있다. 미디어를 인간 존재의 확장으로 보고, ‘전기'가 궁극적인 확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에서 이런 결론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매클루언의 관점에서 존재의 확장은 ‘인간 감각의 확장'인데, “인간의 감각들은 개인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데에 반드시 지출되어야 하는 고정비용이고 그것들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과 경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카를 융(Carl Gustav Jung)을 인용한다.


https://exploringyourmind.com/10-differences-freud-jung/


융이 프로이드와 다른 점은 우선, 프로이드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개인'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본 반면 융은 ‘집단'(혹은 인류)로 범위를 넓혀서 살펴봤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융은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몸과 마음의 이원론(mind body problem)적 접근과는 달리 ‘집단 무의식'이 다시말해 어떤 ‘원형'이 ‘지극히 긴 시간의 경험의 축적의 결과 구성된 것으로 유전적으로 마음에 계승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그는  원형(Arche-Typ)이라고 불렀다. (나는 인간 유전자에는 커넥톰 패턴의 일부가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의식 그리고 융이 말하는 ‘원형'도 이 커넥톰의 패턴으로 역시 유전자에 기록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 융에게 있어서 ‘원형'은 과거에 고정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매클루언의 ‘원형'은 확장되는 것,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매클루언은 “전기 시대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점점 더 정보 형태로 번역되어 의식 자체의 기술적 확장이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p.127)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매클루언이 보기에 이런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교환의 가속화'는 ‘부담’이며 ‘신체의 절단'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는 예를 들어 “문자 미디어와 화폐 미디어에 의해 생겨나게 된 교환의 가속화라는 새로운 부담은 발의 기능이 확장되는 것 또는 우리의 신체로부터 발의 기능이 ‘절단' 되는 것의 생생한 사례"(p.99)라고 묘사한다. 


그는 ‘오디악'이라는 치과 치료 기구의 사례를 설명을 위해 제시한다.(p.102) 또한 “갑자기 높은 곳에서 추락한 사람은 모든 통증이나 감각적 자극에 무감각해진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변화를 겪는 우리의 중추신경계는 “감각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감각을 차단했다가 확장된 감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인간 자신’이 아니며, ‘자신을 확장한 어떤 물건들에 단번에 사로잡힌'(p.97) 존재이다. 카누와 연결된 확장된 인디언, 말과 연결된 확장된 카우보이(p.106)가 된다.  


우리가 테니스를 치거나 탁구를 칠 때, 골프를 칠 때, 야구를 할 때 우리의 존재가 미디어들로 확장된다.


잘 생각해보면 이러한 매클루언의 통찰은 지금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바이다. 우리가 테니스를 치거나 탁구를 칠 때, 골프를 칠 때, 야구를 할 때 우리의 존재가 미디어들(테니스, 탁구 라켓 골프채, 야구 배트)로 확장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확장이 되면 ‘확장된 우리의 신체’로 정지되어있거나 날아오는 공을 가격한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의 신체는 자동차 크기로 확장된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전기가 ‘궁극적인 미디어’인 것은 손이나 발 등 감각기관이나 활동기관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중추, 즉 ‘중추신경체계'를  ‘몸 밖의 전기 기술 속에 내놓아 버리는'(p.116)  결과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에 이러한 현상을 쉽게 설명할 사례는 드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매클루언은 노이로제에 걸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사례로 제시한다. 즉 “노이로제에 걸린 아이들이 전화를 받는 동안에는 그 증상을 보이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p.125) 


실제로 매클루언의 예언처럼 ‘중추신경체계'에 속하는 인간의 능력이 달라지고 있다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다. 니컬러스 카는 "인터넷이 인간의 뇌를 실제로 변화시킨다"면서 인터넷을 잘 사용하지 않던 사람들이 5일 동안 하루 1시간씩만 인터넷 검색을 해도 거의 활동이 없던 외측 전전두엽 피질이 집중적인 활동을 하는 등 뇌의 회로가 재구성된다고 주장한다. ( 조선일보, <인터넷은 정말 인간의 뇌를 바꿔놓고 있는가> 2014.10.18 ) 


<커넥톰>의 저자 승현준 박사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뇌 회로의 재구성' 즉 ‘커넥톰의 재구성'은 존재의 변화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기계의 생식기’가 될 것인가? 


재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매클루언이 던진 명제들을 따라왔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세계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우리 ‘존재의 확장’이다. 궁극적인 미디어는 전기(네트워크)이다. 그런데 전기라는 미디어는 우리  ‘중추신경체계'를  ‘몸 밖의 전기 기술 속에 내놓아 버리'게 한다. 그의 예견대로 우리는 우리 몸에 3차원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고, 동시성을 갖게하는 - 터미널을 지닌 단계로 오게 되었다. 스마트폰은 항상 연결된 ( always connected ) 터미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클루언이 ‘어쩌면 놓쳤을지도 모르는’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AI, 인공지능이다. 


세포는 세포 핵과 세포질로 구분할 수 있고, 세포질에는 미트콘드리아와 리보조옴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미트콘드리아를 세포핵과 구분되는 세포질의 한 요소 정도로 생각했지만, 닉 레인이 지은 <바이털 퀘스천 : 생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원래 또 다른 ‘주체’(생명체)로 존재했으며, 지금 세포의 주체(세포핵)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동주체이다. 즉 지금의 세포핵은 진화의 과정에서 (미디어를 통한 인간 존재의 확장을 ‘진화’라는 개념으로 보려는 것은 아니다.) 미트콘드리아를 받아들이며 그 존재를 확장했다. 그러나 세포 안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떠할 것인가? 


다시 묻자면 인공지능은 ( ‘강인공지능’의 출현은 필연이라고 본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의미의 송과선 松果腺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뇌 안에 숨어있는 자아는 없고, 전기-화학적 신호로 연결된 네트워크의 패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미디어’인가 아니면 인간과 마찬가지의 ‘주체’ - 미디어를 통해 확장되는 -인가? 


두 번째 질문을 하자면, 특정 인간 뇌의 커넥톰을 분석해서 이른바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을 했을 때 발현되는 자아는 ( 이와 관련해서는 케네스 헤이워스 <뇌는 시뮬레이션 가능하다> 월간 SKEPTIC vol.7 p.78 ) ‘나’의 확장인가? 아니면 ‘미디어’에서 주체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 궁극적 미디어 전기가 확장된 것인가?  


매클루언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는 앞으로 인간의 언어가 사라질 지 모를 거라고 예상하면서도(p.164), 또 “마치 벌이 식물의 생식기이듯이 인간은 말하자면 기계 세계의 생식기로서 언제나 새로운 형태들을 수태하고 진화시키는 것"(p.107)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의 ‘주체성'을 의심하는 데 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인간이 기계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을 그린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를 우려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장자의 ‘천지편’을 재인용한다. (p.139)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기계처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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