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MBC에 입사해서 30년...나의 작은 역사
2025년 11월 1일, 군 시절 후임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소셜미디어에 어떤 기자가 포스팅한 걸 봤다면서. 그건 1995년 11월 1일 MBC에 입사한 뒤 연수를 받으며 동기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모습도 보였다. 20대의 나도 거기 있었다.
휴가를 하루 내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머리가 무거웠다. 세상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30년을 몸 담아 온 회사에 대해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삶을 돌이켜보고 정리해 볼 때가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글은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회사 MBC, 그리고 그 안에서 몸부림쳤던 나의 기록이다.
보물 1호
법조 출입 2년, 금융감독원과 재경부 출입 등 경제부 2년, 감사원과 정당을 거쳐 외교부 출입 2년. 기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경력이다. 단독기사도 많이 썼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 따로 있다.
서울시 출입기자를 하던 때로 기억한다. 제보를 받았다. 일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난 아이들. 그런데 그들을 품고 가르치는 학교, 그리고 그 학교의 선생님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럴까 싶었는데 가 보니 정말 그랬다. 제도의 허점이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취재했다. 그리고 뉴스데스크에 보도가 나갔다. 그런데 얼마 뒤에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기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선생님들이 정성을 모아 패를 만들었고, 그걸 나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사를 수십 번 다녔지만 내가 꼭 챙겨서 들고 다니는, 나의 보물 1호다. 그리 길지 않은 내 기자 경력 중 해결하지 못한 제보도 많았다. 가장 안타까웠던 게 봇다리에 서류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시던 한이 맺혀있는 분들이다. 제도의 도움을 받겠다고 경찰서 등에 찾아갔던 일들이 '이미 한 번 다뤄진 사안'으로 되어 오히려 해결이 불가능해져 버린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복잡한 사정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기자들은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대변해 줄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공로상
나는 MBC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내가 이걸 들먹이는 건, 무슨 일로 받았는지 말하기 위해서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좌우를 떠나, 언제나 언론을 길들이고 장악하고 싶어 한다. 방송법이 문제가 많다면서도 보완이 안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정권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감사원을 동원하기도 한다. 정부 예산을 지원받지 않는 MBC는 KBS와 달리 감사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런데도 법이나 시행령 개정을 통해서, 그게 안 되면 무리한 해석을 통해서 시도했다. 내가 감사원을 출입하던 2000년대 초에도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안 되는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회사와 함께 애썼다. 내가 공로상을 받은 건 다행히 그때 감사원의 시도가 무위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그런 일은 반복되었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도 감사원은 우회로를 이용해 MBC를 들쑤셨다.
X파일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이란 말이 있다. 2004년에서 2005년 당시 MBC 소속이던 이상호 기자는 X파일을 입수해 취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재벌과 권력기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검찰은 '불법으로 녹음된 음성은 보도하는 것도 불법'이라는 논리를 폈다. 세 번째, 회사가 몸을 사렸다. 냄새를 맡고 다른 언론들이 움직였다. 나는 당시 민주방송실천위원회(민실위) 간사를 맡고 있었다. 보도국 수뇌부에 '보도를 더 미루면 안 된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먼저 1보를 날린 새벽, 나는 소주를 마시며 밤을 꼴딱 새우고 있었다. MBC 보도는 그날 저녁에야 시작됐다.
줄기세포
진실이 승리했다. PD수첩이 시작했고, MBC 보도국 특별취재반이 줄기세포를 둘러싼 거짓들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 YTN을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이 황우석 편을 들었다. 심지어 정부까지 나서 MBC에 압력을 가했다. 광고가 끊겼다. 여의도 MBC에 찾아와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심각했다. 기자들도 처음에는 PD수첩의 취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민실위 간사였던 나는 신정수 PD와 함께 어떻게 이 사태를 뚫고 나갈지 고민했다. 두 사람은 한학수 피디를 찾아갔다. 거의 3시간 가까이 면담을 했다. 어떻게 취재가 시작되었고, 확보하고 있는 팩트가 무엇인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취재 과정에서 '취재윤리'에 어긋난 것이 있는지 등등을 모두 물었다. 그걸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보도국 수뇌부에 전달했다. 당시 내가 쓴 보고서의 결론은 "PD수첩의 보도가 맞다"였다.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보도국에 특별취재반이 꾸려졌다. 뛰어난 기자들이 투입됐다. 그리고 그 거짓의 성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6자 회담
외교 전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방송기자로서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법조전문기자도 경제전문기자도 노려봤지만, 대개 1분 10초에서 1분 30초 정도의 짧은 기사를 쓰는 방송 기자가 불리한 점이 많았다. 깊이 팠다. 책도 많이 읽었다. 긴 기사를 쓰는 신문기자에 비해 문장력도 취재력도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취재 칼럼도 블로그에 열심히 썼다.
6자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각국 6자 회담 수석대표들에게 공격적으로 질문했다. 영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핵심을 묻고자 했다. 기껏해야 회담장과 숙소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짧게 하는 외마디 질문이었지만 노력이 통했다. 미국 측 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과 가까워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가 주한미국대사가 되었을 때 단독 인터뷰를 했다. 우리 측 수석대표였던 천영우 전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도 6자 회담을 통해 가까워졌다. 세 사람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세미나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지 않게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전문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깊이 취재를 했기 때문에, 원고가 없어도 방송 출연이 두렵지 않았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당시 전문기자이던 김현경 선배와 밤을 새워가며 특보를 이어가던 일이 생생하다.
김정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사후를 대비해 후계자를 키우고 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그 존재에 대해 여러 추측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신에서 가끔 Kim-jung-un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은'이 맞는지, '운'이 맞는지 아무도 몰랐다.
당시 나는 외교안보팀 수석 데스크였다. 제보가 들어왔다. 북한을 방문한 관광객이 찍은 사진이 공유 사이트에 올라왔는데, 찬양 문구에 '김정은'이라고 한글로 되어있더라는 거였다. 당시 우리 팀은 국내 모든 언론사 중 최강이었다.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 국방부, 청와대 등의 모든 취재망을 가동했다. 사진이 신빙성 있는 것인지부터 확인했다. 최형문 기자가 뉴스데스크에 단독으로 보도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 시절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김정은'으로 불리게 된 날이었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우리 기자들이 각 기관에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 기관들은 타사의 확인요청에 대부분 곧바로 답했다. "MBC 보도 맞아요!"
비대위원장
2008년 가을, 미국 워싱턴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있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보도국에 큰 사달이 났다. 2009년 초다. 당시 대통령이 뉴스데스크 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몹시 싫어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교체 압력으로 구체화되었던 거다. 있어선 안 될 언론탄압이었다. 4월 9일,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나서기로 한다. 그런데 보도국 기자회장이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도망간 거였다. 당연히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 상황에 나는 기자 구성원들에 의해 처음엔 '대변인'으로, 곧이어 '비상대책 위원장'으로 지목되었다.
나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다.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초유의 단체행동이었다. 제작 거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어떤 시점에 후배들에게 '나를 믿고 보도국으로 올라가라.'라고 당부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제작거부를 마무리했다. 오히려 당시 보도국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큐
나는 기자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창사 50주년 특집 다큐 팀으로 보내졌다. 기사를 쓰는 게 직업인 나를 기사를 쓸 수 없는 곳으로 보낸 조치였다. 기자들과 감독들이 각각 한 편씩을 맡아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다큐를 찍는 기획이었다.
영광스럽게도 이명세 감독, 류승완 감독, 김현석 감독 이런 분들과 같이 작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전화'라는 주제를 맡아 한 시간 분량의 다큐를 연출했다. 사정이 열악했던 까닭에 작가나 촬영감독이 해야 할 역할까지 내가 맡았다. 스크립트는 작가 없이 전부 내가 썼고 촬영도 50%는 내가 했다. 편집도 했다. OST 두 곡을 만들었다. 그중 한 곡은 내레이션을 맡았던 요조가 불렀다. '전화를 걸어'라는 곡이다.
시청률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초보 연출이었던 나로선 뿌듯한 결과물이었다. 두 번째 다큐도 만들 예정이었다. '청년 실업'을 주제로 하겠다고 발제했고 이미 취재도 진행했었지만 거부당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나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힘내라 MBC
2012년, MBC 구성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어쩌면 그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파업이 장기화됐다. 그때 당시 나는 '힘내라 MBC 인터뷰'라는 시리즈 제작물을 만들었다. MBC 기자들의 파업이 결코 진영논리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우리 사회의 어른들 입을 통해 듣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였다.
그 코너에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분들이 나서 인터뷰를 해주셨다. 당시의 직책을 그대로 붙여본다. (가나다 순이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 고계현 경실련 사무총장, 금태섭 변호사, 국회의원 김성태, 김장수 전 국방장관, 감독 김현석, 국회의원 남경필, 작가 박범신, 감독 변영주, 故 신영복 교수, 안경환 교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음악인 이상순, 이석연 변호사, 새누리당 대선주자 이재오, 감독 이해영, 정운찬 전 국무총리, 조국 서울대 교수, 작가 조정래, 배우 차인표, 등등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성공회대 연구실로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단기적인 성과를 쟁취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과정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 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정의감을 가지고 가느냐 그게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다. 내가 찾아갔던 그날은 파업이 170일이 넘어서던 시점이었다.
저널리즘
언론의 자유가 극히 위축되던 시절에 MBC에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방송기자연합회에 당시 SBS 기자였던 심석태 선배(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등 뜻있는 몇몇 기자와 강형철, 윤태진 교수님 등 언론학자들이 모였다. 어떻게 하면 방송 저널리즘을 바로 세울까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다.
그 결과로 얇은 책 한 권이 나왔다. '저널리즘의 7가지 문제'(컬처룩)라는 제목이다. 책은 서문과 본론, 그리고 설문조사 결과 분석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는데 내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의 집필을 맡았다.
'이성주 기자'로 검색어를 넣으면 지금도 그 책 소개 페이지가 나온다. 나는 2015년부터 야간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2018년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썼던 논문의 제목은 <방송 뉴스의 페이스북 활용에 관한 연구 : 지상파 방송사간 비교를 중심으로>이다.
삭발
2013년 2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 선배의 전화가 왔다. 집 앞이라고 했다. 맥주집에 가보니 해고자 3명이 와 있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해고자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노조위원장이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해고자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서 돈을 꾸러 다녔다.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형사소송,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 해고무효 소송, 엉뚱한 인사 발령을 철회하라는 무효소송 등 수십 건의 재판을 챙겼다. 집회에 나가면 '죄송하다.' '잘못했다.' '우리 구성원들이 나름 제대로 보도하려고 열심히 하고 있다.' 이런 멋없는 말들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지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는 내가 노조위원장을 맡는다고 했을 때 절대로 3가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파업, 단식, 삭발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나는 그 약속을 어겼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MBC도 타사와 마찬가지로 '전원구조 오보'를 냈다. 타사는 사과했지만 MBC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MBC를 비난했다. 명색이 MBC 노조위원장인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때 삭발을 했다.
나는 사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당시 여의도 MBC 지하에 있던 미용실에 혼자 가서 머리를 깎아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라도 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고 유가족들에게 사죄하러 찾아가야 했다.
상처
회사는 조합에서 민주방송실천위원회 간사로 일하던 후배 한 명을 보도국 뉴스시스템 해킹범으로 몰아 해고하려고 했다. 그건 진실이 아니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힐 수 없었다. 조합원들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안 하려고 하는 공적인 임무를 맡아하는 그 뛰어난 후배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해고가 되게 만드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선배가 되는 것인가?' 나는 몇 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게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것이지만 그중 하나는 비굴한 행동이었다. '노조위원장'임을 일부러 잊어버리고, 당시 회사 간부들에게 간청했다. 정말 아니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제발 해고만은 안 된다고. 그는 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상수역
2014년 겨울, 2년의 노동조합 위원장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후임을 구할 수 없었다. 명망 있는 기자 후배들도 모두 그 자리를 거부했다. PD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 나는 못한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때 상암동 미디어센터 11층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던 세상은 너무 차가웠다.
결국 '연임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당연했다. 내가 맡았을 때도, 내 다음 임기도 전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였다. 그런데 선배 PD 한 분이 내 후임 위원장으로 나서겠다고 결심하셨다. 그 결정이 내려지던 날 저녁, 홍대에서 상수역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선배가 마지막으로 고민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경제부장
2018년 보도국 경제부장에 지명되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제 보도와 다른 차원의 보도를 이끌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직전의 백서 작업도 있었고, 저널리즘에 관한 책을 쓴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금감원과 재정경재부 등을 출입했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제대로 된 취재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통신사 제목 뽑기에 좌우되는, 취재에 바탕하지 않은 기사는 절대로 쓰지 말자'라고 매일매일 강조했다.
당시 경제부에는 신지영 기자, 노경진 기자, 장인수 기자, 조현용 기자, 이기주 기자 등 훌륭한 기자들이 많았다. 부장으로 있는 동안 경제부에 단독 보도가 많았다. 새로운 뉴스 형식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후회가 많다. 부장의 의욕이 너무 앞섰다. 후배들의 마음도 잘 몰랐다. 보도국을 떠났었던 10년 간의 공백은 작지 않았다.
두 번의 북미정상회담
내 꿈은 외교안보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외교안보 전문 기자도 외교안보 팀장도 못 되었다. 워싱턴 특파원 공모가 있었지만 지원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기회가 가야 할 참이었다.
너무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세기의 북미정상회담은 두 번 모두 내가 취재 단장을 맡았다. 경제부장 당시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 현장취재 단장을 맡았고, 인터넷뉴스팀장 시절에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취재 단장을 맡았다. 1차, 2차 모두 'MBC 단독'이 많았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 매체와 정보를 교류했다. 1차 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의 숙소에서 김재경기자가 했던 단독 보도는 그런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2차 하노이 회담 당시에는 1차의 경험을 살려 사전에 두 정상이 움직일 동선을 면밀히 예측했다. 김정은 위원장 열차 도착 장면 단독은 그렇게 나왔다. 또 베트남 현지 매체와의 사전 교류를 통해 타사보다 먼저 정보를 입수했다. 1, 2차 북미회담 취재단장을 모두 맡은 사람은 국내에도 해외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끝까지 Live
2000년대 말 보도국을 떠나 2017년까지 10년 가까운 시간, 기자로서는 공백기가 분명했지만 내가 그냥 세월을 흘려보냈던 건 아니었다. 기자가 아니라 '사업 팀' 팀원으로서 뉴스 콘텐츠가 어떻게 인터넷과 포털 등을 통해 유통되는지 살폈다. 그 인연으로 인터넷 뉴스 팀장을 맡게 되었다.
MBC뉴스 유튜브 채널이 지금은 구독자 600만을 자랑하지만 그때는 타사에 훨씬 뒤졌었다. 나는 그때 '끝까지 Live'를 시작했다. 작명은 동기인 김연석 기자가 해줬다. 당시만 해도 MBC뉴스 유튜브 운용의 원칙은 방송 편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틀을 과감히 깼다.
심지어 방송 중 화면에 빈 마이크만 있을 때도 '그대로 라이브를 이어가자'는 원칙을 세웠다. 유튜브의 실시간성, 그리고 화면뿐만 아니라 채팅방과 댓글도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였다. 매번 iMBC의 담당자와 밤늦게까지 메신저를 주고받았다. "끊을까요?" "아니, 갑시다! 제가 책임집니다." 주로 이런 대화였다. 그리고 MBCNEWS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쓰이고 있는 MBCNEWS앱도 내가 기획해 만든 것이다. 뉴스 소비자의 수요가 달라졌는데 MBC뉴스 앱이 개편되지 않고 방치되는 걸 놓아둘 수가 없었다. 예산팀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해냈다.
wavve
인터넷 뉴스 팀장을 마친 뒤, 나는 MBC 미디어기획국장을 맡게 되었다. wavve 이사도 같은 시기에 겸직했다. 뉴스라는 영역을 벗어나 시사교양, 예능, 드라마 콘텐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 공부했다. OTT와 빅테크가 바꾸어놓은 콘텐츠 유통 환경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시기 '리뷰닷'이라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5년,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나는 매일매일 빠짐없이 스크랩을 올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2024년 3월 나는 MBC의 기술 자회사인 iMBC의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화두, AI를 따라잡느라 애쓰고 있다. 우리의 미래,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답을 찾고 있다.
기자로서 내가 꾸었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MBC에서 지내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욕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매 번 약지 못한,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옳은 길은 무엇인가?' 질문했고 나는 그 답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아마, MBC에서 내 앞의 삶 또한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다시 어리석은 선택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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