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캠퍼스 예술대학은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그중에서도 문창과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각지 출신의 학생들이 모인 대표적인 학과였다. 내가 알기로는 90년대 중반까지 서울 출신 학생들이 한 학번에 열 명 남짓 그러니까 정원의 25%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서울 출신 학생들도 통학을 하지 않고 자취를 했으니, 문창과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자취 생활을 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1학년 1학기는 대부분 기숙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신입생에게는 4인실이 배정되어 생활하기에 불편했고 입실 마감시간이 정해져 있어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즐겼던 문창과 학생들에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게다가 신입생에게 최우선으로 배정되다 보니 2학년부터는 성적이 좋아야 기숙사 입실이 가능했다. 아주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문창과에는 그 정도의 성적 기준을 맞출 수 있는 학생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빠른 사람은 1학년 2학기부터, 보통은 2학년 1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하곤 했다.
자취촌은 안성캠퍼스 근처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가까운 순서대로 내리, 죽리, 밖들, 당촌에 있었다. 그때는 요즘 지방캠퍼스 주변에 흔한 원룸형 자취촌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 안 쓰는 문간방이나 별채를 개조해서 학생들 상대로 월세를 놓았는데 보통은 학기 단위로 돈을 받았다. 그러니까 월세가 5만 원이고 방학 중에는 거주하지 않더라도 6개월 치 30만 원을 선지불해야 했다.
월세 5~6만 원짜리가 기본으로, 주로 방 한 칸에 씻는 공간 하나가 딸려있었고 화장실은 주인집과 같이 쓰거나 학생들끼리 같이 쓰는 공용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공과금만 내고 그냥 살거나 비싸봐야 한 학기 10~20만 원 수준의 자취방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90년대 들어 주변 마을 주민들도 자취생들을 주요 수입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해서 30만 원 이하의 자취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90년대 중반부터는 방마다 개인 욕실을 갖춘 원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월세도 기본 10만 원 수준으로 대폭 올랐다.
나는 자취방이 주로 있던 학교 주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1학년 2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안성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면 읍내 들어서기 전에 대덕면사무소가 있었는데 그곳이 건지리라는 마을이었다. 부모님이 전세로 자취방을 구해주셨는데 마침 그 마을에 전세방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자취방을 구한 이후로 그 마을에도 한두 명씩 방을 구하기 시작해 문창과생들의 자취촌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걸어서 통학할 수 있는 길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음악대학에서 조그만 산을 넘어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서관 뒤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가는 조금 먼 길이었다. 낮에 천천히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혼자 자취방에 돌아갈 때는 두 번째 길을, 술자리를 마치고 밤늦게 여러 명이 모여 자취방에 돌아갈 때는 단거리인 첫 번째 길을 택했다.
산길 주변에는 배나무 밭이 있어서 봄이면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가을이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배 열매가 달렸다. 물론 우리는 그 길을 주로 밤에 술 취한 채로 다녔기에 배꽃도 배 열매도 자주 보지 못했지만, 달빛도 없는 캄캄한 날이면 무서움을 떨쳐내느라 떼창을 해댔고, 술 취한 선후배를 부축하느라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배꽃보다 하얀 사랑이 피어났고, 빛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불나방처럼 그 길 너머의 자취방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