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추 Jun 08. 2023

두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

기억 속 이야기

2학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쯤, 과내동아리 후배이기도 했던 여학생 한 명이 동기와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는지 무척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 낯을 많이 가려서 친한 남자 선배들과만 어울리고 여자 후배들에게는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곤 했다. 그래도 그 여학생은 동아리 내에서 자주 만나고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대화도 몇 번 해봐서 그나마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느 날, 내가 대학시험 보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암자에 자신을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해왔다. 내가 그녀에게도 암자에 갔던 얘기를 했는지, 다른 선배에게서 내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녀가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가 암자에 자신을 데려다 주기만 하고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도 그녀와 함께 암자에 머물기로 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선배로서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녀 또한 처음에는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겠지만, 혼자 암자에 머무르기에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암자는 전남 영암읍에서 버스를 타고 독천이라는 곳에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어느 마을 입구에 내려서도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하는 산골짜기에 있었다. 스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있고 싶은 만큼 편하게 지내다 가라고 말해주셨다. 암자에는 방이 두 개뿐이어서 나는 스님이 지내시는 방을 같이 쓰고 그녀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군불을 때 본 경험이 있어서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자취 경험을 살려 스님 밥도 차려드리고, 스님이 시키는 허드렛일도 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다. 그녀도 학교에 있을 때보다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지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우리가 암자에 온 지 이삼일 지나서인가 스님이 읍내에 일이 있어서 주무시고 온다고 하셨다. 아마도 스님은 우리가 썸을 타고 있거나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셔서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주려 했던 것 같다.


스님에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니 그러실 필요 없다고는 못하고, 굳이 방 두 개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저녁을 같이 먹고 서로의 방에 있다가 그녀가 TV를 보겠다며 내가 있던 방으로 오고, 제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드라마에서 키스 장면인가가 나와서 내가 침을 꼴깍 삼키는 몹쓸 꼴을 보이고, 스님이 키우는 고양이가 내 무릎을 파고들기에 고양이에게 ‘왜 나한테 오니, 저 누나가 예쁜데’ 같은 뜬금없는 말을 하다가, TV에서 더 이상 볼 프로그램이 없어져 쭈뼛거리던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가면서, 그날이 지나갔다.


사실 지금이니까 이렇게 묘한 뉘앙스를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지, 그날 밤 나는 조금도 이상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후배들 중에서도 유독 착하고 예쁘장한 그녀가 마음에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성에 대한 호감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몰랐거니와, 얼마 전의 이별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30년이 지난 그날의 생생한 기억은 이성과 단둘이 한 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어색함과 긴장감의 결과일 것이다.


암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그녀는 학교 앞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늦은 시간에 자취방으로 걸어가야 했는데, 그녀가 에스코트를 부탁한 사람은 같은 동아리 선배이고 나와도 무척 친했던 복학생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녀는 복학생 선배와 연애를 시작했다. 

전해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자신의 에스코트를 부탁할 사람으로 나와 복학생 선배 두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중 선배를 선택한 이유는 군대를 다녀왔기에 자신을 계속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연애를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무난히 결혼까지 가리라는 우리들의 예상을 깨고, 그녀는 졸업을 앞두었을 때쯤 복학생 선배와 헤어졌다.


선배와 이별하고 나서 그녀는 우리들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 후에 우리는 그녀가 한예종에서 희곡을 더 공부하고 극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여자 후배 중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말하라면 그녀를 두 번째로 꼽는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 나는 그때가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그때의 순수함이 그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털어놓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잊어버릴 수 없는 'Lost Reflecti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