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추 Jun 09. 2023

첫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1)

기억 속 이야기 5-1

첫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

군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온 나는 선배들의 총애와 후배들의 신망을 동시에 얻어야 하는 복학생의 어려운 지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과내동아리 활동도 하고 학과소식지를 만드는 일도 맡아서 바쁘게 생활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던 바, 대학 생활을 통틀어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밤마다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지혜의 불벼락’을 내리는 고학번 선배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내가 연애를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말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편이어서 말수가 적었고 특히 여자들 앞에서는 더욱 말을 안 하는 편이었다. 선배들은 연애를 하려면 말을 해야 한다고, 평소에 호감이 있는 이성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고 귀에 진물이 나도록 나를 다그쳤다. 그런데 나는 사실 연애감정 같은 것을 잘 몰랐고 그냥 남들이 하니까, 남들이 해야 한다니까 ‘나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였다.


복학하고 한 학기가 반쯤 지났을 무렵 동아리 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보다 4년 후배인 한 여학생(학번으로는 4년 후배이지만 다른 학교를 다니다 늦게 입학한 그녀는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았다)이 나 때문에 동아리에 가입했고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그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녀를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동아리 활동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아 만날 기회가 없었고 대화를 해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여자 후배와 내외하던 내가 말을 걸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녀는 약간 ‘또라이’ 기질이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캐릭터로 알려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참 고지식한 편이어서 예상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기 어려웠고 동아리 내에 퍼져나가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에게 특별한 제스처를 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에게 연애를 권하던 선배들도 내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지 실전 연애 코치로 나설 기회를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학교 축제 기간이 되었다. 강의실 앞 잔디밭에서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그 자리에 마침 그녀가 있었다. 대화도 몇 마디 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학교에서의 술자리를 정리하고 누군가의 자취방으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늘 그랬듯이 그나마 넓었던 내 방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미 많이 취해서 더는 술을 못 마실 것 같은 그녀가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사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다. 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조심해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술을 마셨다. 대학 시절 거의 매일 술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 취하도록 마신 것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술자리를 이동할 때면 취한 사람을 챙기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날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작가의 이전글 두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