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추 Jun 10. 2023

첫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2)

기억 속 이야기 5-2

내 자취방은 학교에서 꽤 멀어서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내 자취방으로 갈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올랐고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자취방 근처 정류장에 내린 다른 선후배들은 다들 앞서가고 나는 그녀를 부축하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다.


바로 그때 그녀에게서 구토의 신호가 감지됐다. 얼른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토하게 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반복된 경험이 있어서 그 정도는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구토를 끝내고 조금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던 그녀가 스르르 주저앉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흐느끼는 정도가 아니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큰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이 아닌가. 역시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서 있는데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단 말도 못 하고.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내가 오빠 좋아하는데 좋아한단 말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상황은 낯설었지만 어법은 매우 익숙했다. 술 취한 사람들의 특징인 같은 말 반복하기. 그럴 때 나의 대응법은 일단 상대방의 말에 수긍해 주고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어 그래, 나도 너 좋아해. 그러니까 울지 말고 들어가자.”

“정말? 오빠 정말 나 좋아해?”

“그러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원래 좋아했었어~”


어린아이를 달래듯 과장된 표정까지 섞은 내 말을 듣더니 그녀가 이내 울음을 그쳤다. 나는 얼른 낯선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그러니까 이제 들어가자고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렇게 부축해서 같이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나 보다. 불그레한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오고 그녀의 입이 내 입에 닿더니 이내 무언가 쑥 들어오는 느낌이란.


고백하건대 이것이 당시 스물다섯 살 내 인생의 첫 키스였고, 방금 구토한 이성과의 키스로 따지면 지금까지 통틀어서도 처음인 것이었다(‘엽기적인 그녀’나 ‘색즉시공’ 같은 영화에서 유사한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그 개연성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녀는 그때서야 해야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만족한(?) 표정으로 내 자취방에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언제나 그랬듯 술자리를 이어가는 마지막 전사들의 언어의 향연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예상했던 자취방에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같이 왔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와 그녀가 들어오지 않자 걱정되는 마음에 밖에 나와 본다. 마침 그녀와 내가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어떤 핑계를 대서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에게 그녀와의 오붓한(?) 시간을 마련해 준다(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에게 연애에 관한 ‘지혜의 불벼락’을 내리던 선배 중 한 명이었으리라).


어쨌든 내 자취방에는 그녀와 나 두 사람만 있게 되었고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생활하는 학교 기숙사는 진즉에 문이 닫힌 시간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녀를 술에 취해 잠자리를 찾아 내 자취방에 온 남자 후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끔 해왔던 일이어서 별 문제가 없었다.


옷에 토사물이 묻어있는 그(그녀)를 위해 내 옷을 건네고 씻으라고 한다. 그(그녀)가 씻는 동안 작은방에 이불을 펴주고 나는 내 방에서 책을 본다. 씻고 나와서 제정신이 든 그(그녀)는 미안해진 마음에(그녀의 경우에는 미안함 반 부끄러움 반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배와 마주치지 않도록 작은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때만큼 내 자취방이 두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내 방 문을 닫고 책을 펴 들고 있었지만,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며 작은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약간 긴장하기도 했던 것 같고 알 수 없는 기분에 잠을 설쳤던 것도 같다. 아마도 잠든 스테파네트 아가씨 옆에서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우는 목동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잠을 청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첫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