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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추 Jun 11. 2023

첫 번째로 만나고 싶은 그녀(3)

기억 속 이야기 5-3

다음날 일어나 보니 그녀는 이불을 고이 개어놓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성에 대한 감정이어서 그럴 수 있는 걸까.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잘 들어갔는지 걱정되고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삐삐(참으로 오래전에 사용된 물건이다...)에 잘 들어갔느냐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학교 수업도 빼먹은 채 그녀에게서 응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다.


이상하게 그날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밥을 먹었는지 차를 마셨는지, 정확히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결론만 말하면 나와 그녀의 관계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날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그녀의 나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거나. 우리는 그냥 가끔 만나는 선후배 사이로 돌아갔다.


그녀와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였다. 둘 다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난 날, 학창 시절 서로에 대한 감정에 시간차가 있었을 뿐이었음을 확인하고 만남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인 비슷한’이란 표현을 쓴 걸 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그때의 만남 역시 제대로 된 연애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때도 연애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녀가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는 너무 뻔해. 조카랑 장난감 칼싸움을 하는 것 같아서 재미가 없어.”


나는 당시 그 말뜻도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제대로 같이 놀러 간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구리에 있었고 그녀는 안산에 있어서 워낙 거리도 멀었던 데다가 내가 학원 강사로 일하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띄엄띄엄 관계를 유지하다가 내가 갑자기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시골에 내려가면서 더 관계가 소원해졌다. 나중에 그녀가 독일에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그녀가 독일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다시 잠깐 만났다. 또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호주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리고 최근에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서울 종로 거리를 함께 걷고 있었는데 옆에서 걷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길가에 놓여있는 탁자에 올라가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높은 곳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자세히 보려고 그런다는 것이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얼른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보려던 것을 다 보고 나서야 천천히 내려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지니지 못한 면을 가진 사람에 끌린다는 말을 그때 체감했다. 비록 내가 그러지는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대로 인정하고 심지어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소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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