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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추 Jun 13. 2023

양송이 게임

기억 속 이야기 6

대학 시절 수업 시간, 책 읽는 시간, 습작한 시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술자리였고, 두 번째로는 고스톱을 친 것이었다. 특히 군대 가기 전, 그러니까 3학년 1학기까지 거의 하루 걸러 고스톱을 치고 살았다. 사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스톱을 칠 줄 몰랐다. 어린 시절 형제들끼리 민화투를 쳐 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이 명절 때 모여서 한다는 고스톱이나 포커 같은 게임을 전혀 할 줄 몰랐다. 


1학년 1학기 때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주말이면 기숙사에 있는 동기들과 함께 선배들 자취방에 놀러 가곤 했다. 처음엔 선배들이 차를 내주며 대학 생활은 어떤지 물어봐주기도 하고 1학년보다 조금 더 많은 지식을 뽐내며 문학적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런 얘기만으로는 채 한 시간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럴 때면 선배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었다.


“우리 한판 칠까?”


그러고는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인 경우 군용 모포를,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선배나 여자선배인 경우 기숙사 담요를 깔고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당들이라도 대낮부터 후배들에게 술을 권하기는 미안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전날 마신 술이 덜 깨서 그랬는지, 선배들도 술은 저녁이 돼서야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고스톱은 술자리가 시작되기 전까지 어린 후배들과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할 줄 모른다고 빠져 있었는데,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동기들이 기숙사에서 고스톱 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처음엔 점수 계산하는 것도 어렵고 ‘고’와 ‘스톱’을 해야 할 타이밍을 몰라서 흥미가 붙지 않았다. 게다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들이 저마다 자기네 지방의 고스톱 룰이 정통이라며 우겨대는 통에 정확한 게임 방법을 익히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찾아오는 ‘달콤한 재미’에 난 푹 빠져버렸다.


‘이렇게 재미난 걸 내가 왜 모르고 살았을까?’

선배들 자취방에 찾아가면 고스톱 치자는 말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고, 기숙사 내에서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동기들과 고스톱을 치곤 했다. 본격적으로 판을 벌인 것은 1학년 2학기 때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직 기숙사에 머물러 있던 동기들이며 주변의 선배들이 내 방에 몰려와서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시간 투자와 고수들과의 대전 경험으로 나의 경기력은 날로 향상되었다.


그렇게 자주 고스톱을 치던 멤버 중에 양 씨 성을 가진 선배와 이 씨 성을 가진 동기(바로 ‘뚫린 귀’를 이끌었던 친구)가 있었다. 선배와 동기가 동향 선후배로 친했고 나와 동기가 매일 붙어 다닌 사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세 명이 서로의 자취방을 돌며 고스톱 리그를 펼치기 시작했던 바, 세 명의 성을 따서 ‘양송이 게임’으로 부르게 되었다(송은 나의 성이다). 문창과에서 고스톱 좀 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한 차원 더 깊이(?) 고스톱을 즐기는 멤버들의 조합이었다.


문창과에서는 고스톱을 칠 때 판돈을 걸지 않고 책 내기를 했다. 50점이나 100점을 정해놓고 그 점수에 도달한 1등이 나오면, 3등이 1등에게 책 두 권을 주고 2등이 1등에게 책 한 권을 주는 식이었다. 고스톱을 가볍게 즐기는 사람들은 시집으로, 뜨거운 만남을 원하는 멤버들은 소설책으로 정하곤 했는데 ‘양송이 게임’은 핵심 멤버들의 리그이니만큼 소설책만 취급했다.


정확히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양송이 게임’으로 가장 많은 소설책을 빼앗긴 사람은 바로 나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승부욕에서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양 선배와 동기는 책을 얻을 때까지 고스톱 판을 결코 끝내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새벽녘의 정산 시점에서 나는 그들 중 누군가에게 책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분하거나 아깝지는 않았다. 누구 자취방의 책장에 꽂혀 있든지 어차피 돌려가며 읽을 소설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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