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소녀 Dec 22. 2023

끊어진 듯한 길 위에서

김소영 에세이, <진작 할 걸 그랬어>

마 전 우리 회사는 큰 조직개편을 했습니다. 내가 맡고 있던 업무와 속해 있던 조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참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본격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시기였기에 근무 시간의 많은 부분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동료들과의 분석, 방황, 불안으로 채워졌습니다. 과도한 업무를 한 것도 아닌데 집에 가면 빡빡하게 일을 하는 것보다 그렇게 피곤하다고들 했어요.


MBC 전 아나운서이자 현재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소영 저자의 에세이 <진작 할 걸 그랬어>는 처음엔 단순히 도쿄 서점 탐방기인 줄 알았답니다. 책을 후루룩 펼쳤을 때 감각적인 책방 사진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롤로그에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무력한 개인으로서 겪어내었던 분노, 괴로움, 불안이 생각보다 심각하고 솔직하게 담겨져 있었고(당시 MBC는 권력에 항거해 파업에 참여한 많은 직원들을 장기간 노골적으로 방송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조직개편의 여파에 심적으로 휘청이던 시기, 저는 처음부터 이 책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빼앗긴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매일 우두커니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매일 사내 도서관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하며 아홉 시간의 근무 시간을 견뎌내다가 더는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무작정 퇴사를 감행했습니다. 아무런 계획이 미처 마련되지 않은 채로요.


퇴사 직후 그가 '도쿄의 책방'으로 떠난 이유는 가까이에 위치한 도쿄가 익숙하면서도 현실을 떠나온 느낌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었고, 책방이란 공간이 그에게는 늘 마음을 채워주는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책에 늘 진심이었던 저자로서는 디지털 기기와 영상 매체의 홍수 속에서도 여전히 책 읽는 인구가 많고 출판 강국인 일본에게 궁금하고 배우고 싶은 점도 많았겠지요. 그리하여 시작된 일본의 책방 여행은 여름과 겨울 2회에 걸쳐, 처음엔 그저 자유로운 백수로 시작하여, 결국 직접 책방을 차리고야 만 후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찾아다니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책방 여행가로서 떠난 길에는 과연 서점 강국답게 진기한 책방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 '책 X 무엇'의 조합은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이었죠. 늦은 밤까지 책과 맥주를 함께 파는 서점, 쇼와 시대 한 때의 영화를 간직한 비좁게 잘려나간 건물 안의 고서점, 거대한 규모의 라이프스타일 편집샵에 어우러진 서점, 정갈한 일본 가정식 백반을 먹으며 사진집 감상이 가능한 서점, 또는 한 주 동안 단 한 권의 책만을 파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형태의 서점.. 등. 도쿄 구석구석 이어지는 서점 탐방기에서는 서점이 위치한 동네의 특징 뿐 아니라 함께 가본 맛집, 카페, 찻집, 특색 있는 쇼핑몰 등 나도 당장 가보고픈 정보들도 덤으로 얻을 수가 있어요. 함께 떠난 남편 오상진 아나운서와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참 재밌습니다.


이미 책방 주인이 된 후 다시 떠난 여행길에서는 이제 자신만의 공간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를 배워가는 저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는 이미 하루종일 커피만 뽑다가 분리수거에 설거지까지 마치고 귀가하면 이러다 딱 죽겠다 싶고, 매일 서점에서 해야 하는 '막노동' 수준의 일을 하며 지속 가능한 서점 주인으로서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던 때였지요.



한 권의 책을 다 읽어갈 무렵 제게 다가와 남는 것은 사실 이국의 책방도, 퇴사 그 자체도 아닌 저자의 단단한 내면이었어요. 예기치 않게 막혀버린 길 위에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찾아나가고,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것들에 대하여 누구보다 진지한 탐구의 자세로 길을 찾아나가는 책임 있는 모습이요. 혹독한 남 탓과 자기 연민에 빠질만도 한 상황이련만, 툭툭 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그가 읽어온 책의 힘 때문은 아닐런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조직적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줄 알고, 어떤 일을 할 때 가치를 느끼며,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를 알아낸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혹시 사방이 막혀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나요? 내 생각보다 잘 받지 못한 고과 때문에, 승진에서 밀려서, 새로 맡은 업무에서도 별 기대가 느껴지지 않아 낙담하고 있는지요? '진작 할 걸 그랬어'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이자 저자가 에필로그에도 담은 말인데요, 그 한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저의 마음도 담아 맺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


이 책의 제목 '진작 할 걸 그랬어'가 '진작 퇴사할 걸 그랬어' 혹은 '진작 책방 할 걸 그랬어'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진작 고민할 걸 그랬어'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탄탄대로일 거라 믿었던 아나운서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왜 나에게만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찾아온 것인지, 한동안 많이도 억울해했다. 하지만 내게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도 다름 아닌 그때 겪어낸 시간이었다. 앞으로의 인생에도 괴로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자주 찾아올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내게 주어진 길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 혹은 아무런 갈림길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심지어 모든 길이 끊긴 것만 같을 때조차 내가 걸어갈 길을 분명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



p.s. 지금 그의 책방은 책과 라이프스타일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기업으로 성장했지요. 그는 온라인 서점 북클럽 회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책을 소개하는 편지글을 띄우는데, 제가 여러분께 보내드리는 이 글도 거기서 모티브를 얻어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부자가 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