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 이전의 철학책
결혼하고 요리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집에는 살림과 요리에 관한 책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직접 사들인 책, 선물 받은 책... 자주 찾아보고 익힐 요량으로 거실 탁자 한곳에 따로 빼놓은 책들이지요. 도서관에 가서도 먼저 눈길이 가는 책은 요리를 소재로 한 요리 에세이, 식재료 매뉴얼, 도시락 만드는 법 같은 책들이랍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조금은, 아니 꽤나 특이한 책 한권을 발견했습니다. 요리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란 화려한 색채의 음식 사진이 전면에 몇장씩 수록되어 있기 마련인데, 사진이라곤 전혀 없고 누런 갱지 같은 종이에 글만 한가득인 책을 만난 겁니다. 심지어 저자는 '평생 요리를 귀찮아하며 살아왔다'는 92세의 할머니네요.
나는 '대중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쓰는게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조리법을 참조하지 않고 화려한 식탁을 차리지 않는 소박한 여성이다. 이것은 '뭘 해 먹을까' 하는 걱정이나 먹고 사는 것과 호사스러운 요리 준비가 아닌 다른 생각을 마음에 가득 담고 사는 소박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될 것이다. (p.21)
<소박한 밥상>의 저자 헬렌 니어링은 요리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음식과 밥상에 대한 단단한 철학을 가지고 남편과 함께 이를 50년 넘게 실천해온 분입니다. 최대한 '활동적이고 지성적이거나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저자에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에 맞는 신선한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지요. 음식을 탐할 필요도 없고, 하루의 대부분을 먹는 것을 고민하거나(조금 뜨끔하긴 합니다) 음식을 만드느라 화덕 앞에 붙어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제시되어 있는 요리법들은 '조리'보다는 있는 그대로 섞어 만드는 음식들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정확한 계량을 따르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 부부는 병원 한 번 간 적이 없고, 감기에 걸리면 알아서 식단을 조절해가며 92세, 100세까지 건강한 노동을 하며 살았다고 하지요.
사실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익힌 음식(화식)보다는 익히지 않은 음식(생식)을, 죽인 음식(육식)보다는 죽이지 않은 음식(채식)을, 복잡한 음식(가공식품)보다는 간단한 음식(신선한 음식)을 먹을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후자의 음식들이 우리 몸과 환경을 해하지 않고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이유를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하고 있지요.
어떤 음식과 조리법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 외에도 저자가 주장하는 인상적인 내용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남은 재료의 영양가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원들을 제대로 쓰지 않고 매일 쓰레기통으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저자에게는 하나도 허투로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맛있는 식사란 전날 먹고 남은 재료를 이리저리 활용해 재탄생 시킨 것이고, 곡물을 불린 물은 그대로 수프 국물로 쓰거나 화분에 주는 물로 사용하지요. 양파껍질, 파뿌리, 벗겨낸 감자껍질 등을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 맛좋고 영양 만점인 수프 국물로 탄생시키는 것은 저자의 주특기 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경험과 내용이 다소 급진적이라 모든 걸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 정신에는 공감되는 바가 있어 두어 가지를 실천해보기로 합니다. 하나는 식재료에 대한 탐심을 절제하고 최대한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낭비 없이 활용하기, 하나는 씨앗을 발아시켜 보는 것이지요. 안그래도 발아현미가 가장 영양이 좋다는 정보를 접했던 터라 당장 냉장고에 있는 현미를 꺼내서 책에 적힌 싹 틔우는 방법을 따라해 보았습니다.
현미에 물을 붓고 갈아줘가며 기다린지 이틀 반이 지나자 삐죽삐죽 싹이 나기 시작합니다. 생전 식물이라곤 키워보지 않은 저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하루에도 몇번씩 현미를 덮어놓은 뚜껑을 열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한알 한알 보고있자니 이런 숭고한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해보지 않았다면 이들이 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걸 몰랐겠구나, 한톨도 함부로 버리면 안되겠다, 어떤 녀석은 조금 빨리, 어떤 녀석은 조금 늦게 싹을 틔우는 걸 보니 사람처럼 얘네들도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모양이다는 생각.. 이 정도면 저자의 의도에 어느 정도 반응한 독자가 아닐까요?
먹을 것이 넘쳐나고, 매체 속에 남이 먹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현란한 요리 기술이 앞다투어 선보여지는 시대에 이런 책도 한 번쯤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식에 대한 마음가짐은 곧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니,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 간다면 우리의 삶도 좀더 정갈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