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딸에 대하여>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하여

by 구수소녀

내가 어떤 작품의 작가 혹은 기획자라면 평소 궁금해하던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마치 영화 <아주 긴 변명>의 감독이 가까운 사람과 갑작스레 이별한 후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처럼, 소설 <하멜>의 작가가 조선이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선진 기술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 처럼.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하나인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마음에 다가와 느껴지는 소설이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자 딸과 그의 나이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는 누구보다 딸을 이해하고 싶고 딸의 평범한 행복을 보고 싶어 하지만 절대 뛰어넘지 못하는 이해의 벽 앞에서 번번이 절망하고 분노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엄마는 딸에 대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사랑과 희생으로 딸을 키워낸 엄마이고, 딸이 평범하게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로서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작가가 택한 등장인물과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딸과 그 애, 그리고 엄마, 엄마가 요양보호사로 돌보는 대상인 젠. 그 애는 딸의 동성 연인이며 어느 순간부터 딸이 엄마의 집에 끌고 들어와 같이 살며 엄마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그들은 당당하지 말아야 할 것 같건만 넉 달치 월세를 미리 지불하고 들어왔다는 이유로 그리 주눅들고 눈치 보는 모습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그린'이니 '레인'이니 하는 불쾌한 애칭을 불러대다니. 7년 넘게 딸과 연인관계를 이어왔다는 그 애는 내 딸의 평범한 행복을 앗아간 분노의 대상이자 요리에 청소도 잘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가져 왜 누군가의 아내로 살지 않을까 싶은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엄마는 자기가 살아온 전통적인 시대의 가치관에 꽉 붙잡혀 있다. 아무리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남녀가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고 그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 가장 평범하고도 귀한 가치인 판에, 내 딸은 왜 그 평범한 행복조차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싶어 얼마나 부끄럽고 화가 나는지 모른다. 게다가 좋은게 좋은거고 남이 아니라고 하면 받아들이며 사는 세상살이를 해온 엄마는 꼭 제 아빠를 닮은 성격대로 타협을 모르고 제 잘난 것만 얘기하는 딸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래 공부해놓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보따리 강사를 하다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잘린 (자기자신도 아닌)동료를 위해 집 보증금까지 빼다 바치면서 투쟁하는 딸의 모습은 더더욱 이해할 수도 없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다.


또한 엄마와의 대화는 포기한지 오래이다. 얘기 좀 하자고 청하지만 늘 자기의 생각만을 강변하는 엄마에게 딸은 입을 닫았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면서 왜 내 살아가는 방식은 이해해주지 않는 건지 섭섭함을 넘어 단절의 길로 간지 오래이다. 그러면서도 아쉽고 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엄마이다. 엄마는 돈으로라도 딸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안긴다. 이 지점에서 엄마와 딸은 충돌한다. 소설을 읽는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각자의 생각과 주장을 조금씩만 덜어냈으면 싶다. 엄마는 딸에게 포기되지 않는 마음을 차라리 멈춰버리면 어떨까. 딸은 본인을 돌보고 키워준 '부모'로서의 엄마의 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테다.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이고, 딸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기엔 그의 존재 자체가 모 아니면 도를 택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 관계의 평행선은 쉬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화자가 엄마이기에 엄마의 이야기가 좀더 많이 펼쳐진다. 딸에 대한 분노 뒤에는 나이든 엄마의 슬픔이 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 젊은 딸은 이해하지 못할테다. 네가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살려고 하는거니. 세상 사람들이 안된다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그냥 좀 남들처럼 살면 안되겠니.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기를 이해해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자기의 바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딸은 늙어가는 그녀를 슬프고 외롭게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돌보는 '젠'이라는 할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걸까.'


둘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을까.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꼭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에게 어느날 이해란게 오는 날이 있을까. 이해를 할 수 있든 없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든 없든 딸에 대한 엄마의 마음은 쉬이 끝날 줄을 모른다. 작가는 그들의 뒷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는다. 그저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함으로써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 길고 긴 내일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엄마의 마음은 오늘 하루를 지내기에도 버겁고 쓸쓸하기 때문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