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나도 작가다 공모
동화의 끝을 잡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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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혼자 살았던 단칸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나라에서 하는 임대니까 이사 걱정은 안 해도 돼."
피곤에 찌들어 퉁퉁부은 엄마 나방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새끼 나방 두 마리도 군말 없이 따라 들어왔다. 세 나방들은 부지런히 그 작은 방을 드나들며 성장했다. 엄마 나방은 대책 없이 긍정적으로
'나는 작가가 될 거야.
동화책을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엮어낼 거라네...'
노래를 부르며... 새끼 나방들은 그런 엄마 나방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하지만 어느 날 나방 한 마리가 매일매일 퍼 나르던 한 방울의 물들이 모여 바위를 쩍 갈라놓은 것처럼 두 편의 책들이 출판되었다. 새끼 나방들은 드디어 의심을 풀며 보잘것없는 나방의 작은 몸짓이 가진 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누우면 날갯죽지가 툭 튀어나오는 그 작은 방을 나와 지평선 너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보기로 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
여우 그림자
하늘이 조금씩 문을 닫습니다. 춤추던 구름들은 시간에 쫓기는 신데렐라처럼 치맛자락을 끌며 사라집니다. 이제 당신이 올 시간입니다. 천 살? 만 살? 아니 당신에겐 나이가 없습니다. 벙긋 웃는 아기 같은 얼굴로 무한한 시간의 강을 건너옵니다. 당신의 얼굴엔 공룡이 먹던 양치식물과 지난밤, 바람에 떨어진 나의 이파리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마침내 두둥실 둥근달이 떠오르자 신비로운 기운이 한 마을에 감돌았습니다.
흰 눈에 쌓인 뭉게구름 같은 산이었다. 5월의 장미처럼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깊은 발자국을 찍는다.
"여우야 뭐하니?"
바다처럼 푸른 소나무가 묻는다.
"마을을 바라보고 있어. 저 아래... 연기가 솟아오르는..."
여우의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소나무는 여우의 발자국을 묵묵히 바라보다 애나의 발자국을 떠올린다. 매일 이곳으로 올라와 서성이던, 애나의 발자국. 소나무가 여우에게 속삭인다.
"너처럼 저 마을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단다..."
여우가 희미하게 웃는다.
날렵한 입꼬리지만 어쩐지 맥이 없어 보인다. 터널같이 쏙 들어간 배에 갈비뼈들이 안쓰럽다.
"숲 속으로 돌아가거라... 마을을 바라보지 말고..."
소나무가 타이르듯 말한다. 여우는 등을 돌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움직이지 않는다. 소나무는 여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꼬리의 털이 부풀어 오르고 두 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벌써 몇 달째인가? 소나무는 여우가 처음 이곳으로 오던 날을 기억한다.
검고 촉촉한 코는 별처럼 반짝였지.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날이었어. 마지막 갈잎들이 떨어지고 이파리라곤 내 솔잎들뿐이었지. 그때만 해도 통통한 여우 한 마리가 내게로 왔어. 그리고 지금까지... 100일이 넘는 날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을 살피고 있지. 처음엔 그저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소나무가 여우에게 가지를 뻗는다. 여우의 귀가 잠시 옆으로 기울다 다시 곧게 세워진다. 소나무는 알고 있다. 여우의 발걸음이 결코 멈추지 않을 거랴는 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여우는 매일 이곳에 올 것이다.
"소원이란 그런 거지."
소나무가 낮게 중얼거린다. 그리곤 결심한 듯 가지를 거두어들인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여우에게 말한다.
" 도와줄까?"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른다.
"하지만 어 어떻게..."
갑작스러운 소나무의 태도에 여우의 목소리가 떨린다.
"간단해!"
소나무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내 앞에서 재주넘기를 하면 돼. 멈추지 말고 아흔아홉 번. 멈추지 말고..."
소나무는 마지막 단어에 힘을 준다.
"왜?"
여우의 눈이 커진다.
"그건..."
소나무가 잠시 머뭇거린다.
"일종의 시험이야... 네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아보는 거야..."
여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소나무가 덧붙인다.
"네가 명심할 것이 있어."
"그게 뭔데?"
여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림자를 조심해야 돼. 그림자는 너무 정직하거든."
마치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 여우는 귀를 기울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변신을 한다 해도 그림자를 속일 순 없어. 너의 그림자는 언제나 여우 그림자 일거야."
여우는 가만히 소나무를 안는다.
"고마워."
따스한 입김이 주름지고 딱딱한 껍질을 덮는다. 소나무의 눈들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애나가 산으로 가고 있다. 엄마가 남겨 주신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소나무를 향해 걷고 있다. 유일한 친구들 진호와 유진이 눈썰매를 탄다 눈사람을 만든다 야단이어도 앞만 보고 걷는다. '그딴 것쯤.' 지그시 입술을 물자 작은 입이 콩처럼 단단해진다. 드디어 소나무가 나타났다. 세상은 온통 흰색인데 우뚝 서있는 소나무를 보자 병원의 하얀 침대가 떠오른다. 그 위에서 몸을 뒤틀며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난다.
"소나무가 어디 그냥 나무인가? 상서로운 산의 혼령인 게지. 암 산신령이고 말고..."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빠의 누런 얼굴에 비죽이 솟아나던 굵은 수염처럼 신기했다. 그렇다고 애나가 산신령을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산신령과 소나무에서 어떤 특별한 힘이 느껴질 뿐이었다. 애나에게 다가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알았지?"
톡톡 등을 두드리고 돌아가기 바쁜 어른들보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가 믿음직스러웠다.
"저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나가 소나무에게 속삭인다. 언제나처럼 대답은 없다. 하지만 도도한 초록 빛깔은 믿음을 준다. 그리고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애나의 마음이 갑자기 잘 익은 호빵처럼 부드러워진다.
"엄마가 안 되는 거라면 언니라도 상관없어요."
애나의 목소리가 가볍다. 하늘나라에 가신 엄마나 아빠보다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는 쉽게 애나에게 와 줄 것 같다. 그러면 애나의 식구는 3명이 된다. 할머니와 둘 뿐인 가족의 숫자가 3명이 되는 것이다. 셋! 얼마나 안정적인 숫자인가! 희망에 찬 애나! 볼이 붉어진 애나! 기쁨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나무들이 비밀을 품은 아이같이 무뚝뚝했다. 하지만 땅 속 깊이 내려간 뿌리들은 애벌레처럼 꼼지락거렸다. 꼭꼭 손을 잡았던 땅들이 부지직 거리며 길을 열자 온화한 대지의 숨소리가 온 산으로 퍼져 나갔다. 그 무렵 한 여자가 나타났다. 노인들과, 아이들이라야 애나와 진호 유진이뿐인 마을로 '툭' 예고 없이 떨어지는 감처럼 들어왔다. 그리곤 조용히 낡은 자루처럼 엎드려 있던 빈집에 짐을 풀었다. 여자의 손은 작았지만 고추같이 매웠고 부지런했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집이라서 바람도 만만하게 휘젓던 집을 풍성하게 채워갔다. 여자가 살기 시작한 후 마을에는 생기가 돌았다. 차가운 흙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은밀한 기대감이 온 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러던 어느 보름날 밤, 달맞이를 가기로 한 사람들이 어둡고 좁은 산길을 오르고 있다. 오래 산 구렁이처럼 사람들의 긴 줄은 산을 감싸며 꿈틀거린다. 여자도 조용히 그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정상에 오르자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편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웅웅 가슴속에 숨겨운 소원들이 부엉이의 울음처럼 산에 울린다. 여자도 두 손을 경건히 모은다. 은회색 둥그런 달이 손가락에 잡힐 듯이 가깝다.
"진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여자의 허리가 굽어진다. 간절함은 여자를 가늘게 만든다. 은은한 달빛이 여자의 몸으로 쏟아지자 그림자 속에서 검은 꼬리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잠시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곧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악."
"저... 저게 뭐예요?"
"징그러워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사람들이 여자를 에워싼다.
"도와주세요."
여자는 그림자를 온몸으로 가린다.
"절 내버려 두기만 하면 돼요. 그냥 모른 척만 해 주세요."
여자는 희고 긴 손바닥으로 빈다.
"싸악 싸악"
어둠 속으로 간절함이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여자를 에워싸고 비명 지르고 눈을 부라리긴 했지만 막상 그렇게 작은 여자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진 못한다. 치마 속에 숨어있는 낯선 꼬리가 두렵다. 선뜻 손 내밀 용기가 없다. 그래서 모두들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여자를 모른 척하고 만다. '사각사각' 바로 그때 작은 발자국 소리가 여자에게 온다.
"오... 애나!"
여자의 눈에 물기가 찬다.
"가끔은 내 그림자에도 꼬리가 생겨요."
애나의 빨간색 긴 목도리가 허리를 타고 내려와 꼬리처럼 흔들린다. 애나가 스웨터를 벗어 여자를 덮어 준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애나가 웃으며 여자를 본다. 여자의 창백한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여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달빛 곱게 비추는 언덕, 흰 눈에 덮인 고요한 마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걸어간다.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로 뻗은 소나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