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 16화
“세상을 크게 볼수록 문제는 작아지거든요.” (김형석, 롱블랙)
107년 인생을 살아오신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읽어 내려가면서 세상을 ‘크게 보자’는 말씀이 인생을 ‘넓게 보자’라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우리가 말하는 ‘격변’에 대한 체감이 세대마다 다를 수도 있고, 세대를 걸쳐서 일어날 수도 있고, ‘격변’이라기보다는 거쳐야 할 ‘변화’의 시기를 거쳐온 것일 수도 있는데, 변화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변화의 발생 시점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점,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화라는 생각에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다양한 미디어 채널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긴 하다. 다양하면 시야가 넓어져야 정상인데 다양하기만 했지 모두 시선을 끄는 단편적이고 편협한 정보로 일관하다 보니 귀는 더 얇아지고, 시야는 더 좁아지고, 점점 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만 간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고, 100살까지 살겠다고 난리인데 세상을 좀 더 크게 보고 인생을 좀 더 넓게 보면 변화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좀 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을 넓게 보려면 여백이 필요하다
3월 말 포항 송도해변에서 출발해서 강구를 거쳐 영덕 해맞이 공원까지 가는 해파랑길을 걸었다. 코스마다 거리도 다르고 난이도도 다르고, 직접 걸어보지 않으면 지도에 그려진 저 길에 어떤 험난함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걷고 나면 생각보다 쉽고 빨리 완주를 하게 되는 코스도 있고, 굽이굽이 봉을 넘고 넘어 ‘악’ 산을 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코스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다 걷고 나면 똑같다. 하지만 걷는 중에는 어떤 코스냐에 따라 내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는 것을 느낀다. 당장 내 앞에 놓인 길이 험난하면 지금 내딛는 한 치 앞만 보게 걷게 된다. 숨이 턱까지 차오고 다리가 천근만근인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 펄럭이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그리고, 빨리 완주하겠다는 목표로 무조건 돌진하다 보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도, 길가에 핀 개나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걷다 보면 인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아름다운 자연을 눈에 보고 마음에 담으며 둘레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듯이 세상을 크게 보고 인생을 넓게 보려면 여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에 지배당하는 상황을 경계하자.” (김형석, 롱블랙)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을 보면 인간이 만든 것에 역전당하고 지배당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항상 ‘인간다움(Humanity)’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필요한 것만 취하고 아닌 것은 취하지 말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잘 된다 싶으면 더 잘 되고 싶고, 잘 번다 싶으면 더 잘 벌고 싶고, 어느 정도 된다 싶으면 더, 더, 더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더더더를 계속 추구하다 보면 더더더의 틀에 갇히게 되고, 결국 스스로 만든 이 틀에 지배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영화에서 선한 가치를 지키고, 인간애를 지키며,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에 지배당하는 지구를 구하는 그 마지막 사람은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는데 지금 나는 내 인생을 잘 만들어 가고 있나? 부질없는 것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나? 변화’의 열풍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지기 일보직전은 아닌가? 너무 열심히만 달려왔다면 잠깐 삶의 여백을 만들어 보자. 내 인생 지도를 펼쳐 보며 어떤 길들을 걸어왔는지, 지금은 어디쯤인지, 같은 길을 뱅뱅 돌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구조 직전의 상황에 돌입한 건 아닌지 점검하고 다시 길을 떠나 보자. 그래도 늦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