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반생을 살았네 19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구지 큰 기업의 문화를 경험해 보겠다고 용을 쓰는 어리석은 자손에게 조상님은 일침을 내려주셨다. 오지랖만 넓고 줄서기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제발로 기어들어간 것인지. 물론 그동안 열심히 했기에 나를 불러주는 사람도 있고, 기회가 생긴 것이라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고, 솔잎인지 갈잎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먹겠다고 달려들면 치명타가 올 수 밖에.. 시작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잘 해볼 생각으로 합류했지만 인수합병에 뒤따르는 조직개편의 쓰나미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 또한 경험 부족이라면 부족일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또 한 번의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조직 문화를 아주 명확하게 알게 된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내려오니 솔잎으로 만든 동아줄이 내려와 있었다. 천운처럼 인연이 닿았던 비니루 봉다리, 돌고 돌아 재 입사를 하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의 삼위일체, 그래 일은 이렇게 해야 신바람 나는 거지! 다시 입사한 회사에서의 첫 프로젝트는 모 통신사에서 PC, 휴대폰, TV에서 Seamless VOD 서비스 경험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도 유사 서비스로 Netflix, hulu 를 벤치마킹했었는데,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뭐 하나 진득하게 끌고 가는 것이 없으니 런칭한지 몇 년 안되어 안타깝게도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Netflix는 전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OTT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까지 인수하게 되면 HBO, DC 코믹스 등 어마어마한 콘텐츠를 독점하게 되면서 전세계 엔터테인먼트 사업판에 거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 같긴 한데 DVD 대여점이 이루어낸 또 한번의 성공 신화가 될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그냥 대한민국에 미치는 파장이, 그리고 구독자로서의 나에게 미치는 파장이 없기만을 바랄 뿐...
매년 조직 개편을 단행하는 대기업과 일하다 보면 흔히 마주하게 되는 1년 살이, 평가까지 고려하면 채 1년도 안되는 주기로 일이 몰아치기도 하고,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하기도 하고, 갑자기 다 된 밥에 초를 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하던 일이 증발하기도 한다. 송충이가 솔나방이 되기까지도 약 1년의 생애주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속도라면 속성 탈피에 번데기가 되자마자 깨어나와 날아가야 할 판이다.
이름 대면 알 만한 회사에 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희망이고, 그래서 요즘은 취준생이라는 신조어에 대기업 입사를 위해 재수, 삼수를 하면서 청년 실업 어쩌고 하는데, 디자인 에이전시 솔잎을 다년간 먹고 지낸 송충이의 시각에서는 실업이라는데 우리는 왜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지경인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긴 하다. 앞으로의 세상은 내 이름 석자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될 터인데 내 이름에서 조직 이름을 떼고 나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면 그럼 노후를 위해 알토란같이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알토란을 챙기시는 분도 몇 안되는 듯 하다.
이제 정말 2025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나의 이야기는 아직 2010년 즈음에 와 있지만 2026년에는 나의 찬란했던 2025년과 희망찬 2026년의 스토리를 써내려갈 생각에 벌써 마음이 콩닥콩닥 뛴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본격적으로 내 이름 석자로 살아가게 될 2026년, 그래서 더 설레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모두들 남은 2025년 잘 마무리 하시고, 2026년에는 모두 나에게 어울리는 '나다움'을 찾아 내 이름 석자로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팔랑팔랑 나비가 될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송충이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뽀송뽀송하니까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할 애벌레인 줄 알았어요.
꽃과 꽃을 날아다니는 우아한 나비
몰랐어요, 난 내가 송충이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솔나방이 될 거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