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미니멀리즘’에 꽂혀 주변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옷장에 언제부터인가 쌓여 있기만 한 옷가지들과 가방들, 신발장에 더 이상 신지 않는 신발들이 1번 정리 대상이 되었고, 서랍장에 너무 장기간 고이 모셔 두다 보니 마그네틱이 손상되어 더 이상 플레이도 안 되는 영화 비디오테이프들과 오디오 테이프들이 2번 정리 대상에 올랐다. 종이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장에 계속 책들이 쌓여만 가는데 이 또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 정리 대상 3순위, 더 이상 MP3 파일을 다운로드하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스트리밍 세상이 된 이후에도 그놈의 ‘소장’ 욕심 때문에 사재기를 했던 음악 CD들도 두 눈 딱 감고 일부를 정리했고,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방치해서 먼지만 쌓여가는 토이들 몇 가지도 눈물을 머금고 정리했다. 이렇게 한때 눈에 밟혀 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소중했던 것들이 수거함으로, 기증으로, 중고거래로 사라지고, 최종 쓰레기통으로까지 직행을 하였는데 참 재미난 게 세상 아무렇지 않다는 거. 그도 그럴 것이 막상 처분하겠다고 내 눈앞에 다시 일렬종대로 세우기 전까지 사실 이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아무 미련 없는 거 보면 그 정도로 애착이 가는 것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리 끼고 살았나 싶다.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생각했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타의적 강요에 의해 쓰고 그리고, 프라이버시 침해까지 받으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초등학교 시절 나의 그림일기들. 그동안 엄마가 간직하고 있었던 일기장들을 이제는 원 주인의 손에 돌려주시겠다며 일기장 꾸러미를 내미셨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 추억 소환을 하며 킥킥대며 읽고 있는데, 문득 30년 넘게 책꽂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다이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춘기로 진입하던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매년 다이어리 한 권을 연례행사처럼 구입해서 뭔가를 쓰고 싶은 순간마다 끄적여온 기록의 세월이 장장… 차마 계산하고 싶지 않은 세월이 될 정도가 되었다. 추억 소환도 잠시, 어느 날 이러한 나의 흔적들을 누군가가 정리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언젠가는 정리해야 하는 기록들을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실천으로 돌입, 1986년부터 2021년까지 35년 치의 기록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
초등학교 4학년 때 헤어진, 찾을 수 있다면 찾고 싶은 나의 단짝 친구, 연말연시에 으레 주고받았던 카드들, 유니세프에서 온 사진과 편지들, 매일 학교 가면 보는 친구들인데 뭐 그리 할 말이 남아 이 수많은 편지들을 써댔던지… 안타깝게도 편지 주인공들은 대부분 연락이 끊기고 조각 같은 기억의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음먹어야 쓰는 편지와 카드가 그 당시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때로는 비밀스러운 그리고, 꽤나 낭만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이 기억의 조각들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캠핑 가자는 친구의 제안을 받자마자 머릿속에 딱 떠오른 것이 내 손으로 화장 의식을 치러야겠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도 태워버리고 싶은 한 뭉치의 기억을 가져왔고, 그날 밤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사라진 사람들,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사라진 사람들과 사물들은 머릿속을 가득, 거의 꽉 채운 채로 떠나질 않아요.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다는 너무나 이상한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은 일종의 노동 같아요.”
책 속의 글귀처럼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 문득문득 생각나는 추억들이 있다. 가끔 안부를 물어보지만 대답이 없다. 꿈에라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해 보지만 쉽사리 내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것들에게 나는 사라진 존재일까?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 남아있는 것들…
수많은 편지들 중에 태우지 못하고 지금도 매년 다이어리에 끼워두고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는 편지가 있다. 정리하고 정리해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사물들이 있다. 그리고, 보고 싶을 때, 목소리 듣고 싶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함께 할 수 있는 남아있는 사람들, 아직 내 주변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 남아있는 소중함들을 살피며 사는 것,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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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by 콘치타 데 그레고리오(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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