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반생을 살았네 23화
호기심 많고, 관심사가 다양하고, 빠른 적응과 습득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단점이라면 싫증을 좀 빨리 내는 성향이 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하나를 하면서 두세 가지를 동시에 하기도 하고, 새롭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살짝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남들은 5년, 10년 한 회사를 진득이 잘만 다니는 데 2, 3년을 못 채우고 회사를 옮기기도 한다. 일반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뭐 하나 진중히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캐릭터다. 하지만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기에 ‘오해’라는 단어로 애써 변호해 보려 하지만 이해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냥 대충 하다가 다른 걸로 갈아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배움의 경지에 올라 궤도를 타기 시작하면 궤도 안에 새로운 행성을 흡수해서 함께 돌게 하거나 궤도를 이탈해서 또 다른 새로운 궤도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호기심 이야기하다가 웬 행성과 궤도 이야기람? 뭘 그렇게 인생을 피곤하게 살지? 회사를 자주 옮기면 문제 있는 거 아냐? 의지를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깎아내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싶다가도 어차피 홀로 서야 하는 고독한 인생길, 그냥 생긴 대로 난 내 갈 길을 가겠소!
그러다 미국 생활 중 TED TALK에서 ‘멀리포텐셜라이트(multipotentialite)’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며, “You’re not alone.”이라고 외치는 에밀리 와프닉의 강연을 듣고, 뭔가 든든하고 뜨끈 뜨근한 기운과 전율이 느껴졌다. 멀리포텐셜라이트(multipotentialite)를 “다능인”이라 번역하는 사람도 있긴 한데 영어의 뉘앙스에 썩 잘 어울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뜻풀이를 하자면 호기심 많고, 다양한 관심사와 다양한 잠재 능력을 보유하여 남들보다 습득, 연결, 통합하는 능력이 뛰어나 여러 분야에 문어 다리를 걸치고 특정 분야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의 면모 또한 보이며 N 잡러로 활동하기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쉽게 말하면 우리말에 “한 우물을 파라.”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보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한 우물을 파라.”에 반기를 들고 청개구리 같은 행동을 하며 제멋대로 사는 딸내미가 내심 걱정이셨을 듯 하나 결과적으로 보면 세상은 더 이상 한 우물만 파기 어려운 상황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으니 뭐 그렇게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홍보/마케팅에, 영어 선생님에, 웹디자이너에, 기획자에, UX디자이너에, PM에…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나니 어느덧 나도 한 회사에 8년을 정착하게 되고, 미국살이 1년을 하고 돌아와 또 같은 회사에 재 입사를 하게 되더라. 다양한 회사를 다니면서 다양한 조직문화를 경험하니 내가 어떤 조직 문화에 적합한 사람인지 알게 되고, 통신, 커머스, 금융, 엔터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조직이기에 오랜 시간 정착하면서도 지루함을 크게 느끼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멀티포텐셜라이트 기질이 어디 가겠냐…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 돌연 회사를 그만두는 짓도 하게 되고 영어라는 언어와 문화를 가까이서 접하다 보니 귀국하여 다시 본 궤도에 올라타자마자 뭐 하나를 또 올려놓는 짓을 감행하게 되는데… 우물물 마를 날 없는 삶도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