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새로고침 즐기는 게릴라 기획자 '전충훈
동물이 행복한 숲, 사람이 동행하는 숲이란 모토로 예술가, 문화기획자, 학자, 사업가, NGO 대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뭉쳐 ‘동행숲’ 프로젝트를 2015년부터 활발히 진행 중이다.
동행숲이라는 가상의 숲에서 각양각색의 스펙트럼을 지닌 ‘나무 같은’ 사람들이 고유의 색깔로 자라는 중이다. 선한 마음, 크리에이티브, 협업이란 키워드가 동행숲 멤버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아메바 조직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행숲 사람들을 한 분 한 분 소개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전충훈 마르텔로 지역 활성화 랩 대표.
코끼리똥종이를 국내에 선보인 주인공 전충훈 마르텔로 지역 활성화 랩 대표. “종이에서 냄새는 나지 않나?”며 코끼리똥종이를 신기해하는 내게 “다들 낯설어하며 냄새부터 맡는데 똥 냄새는 전혀 안 난다. 보통 종이와 똑같다”고 전 대표는 껄껄 웃는다.
본거지인 대구와 서울을 바삐 오가며 그는 동행숲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아티스트, 기획자들과 협업해 멸종위기 동물 그림책을 코끼리똥종이로 만들 예정이다.
그가 풀어내는 ‘특별한 종이’에 얽힌 사연은 곱씹을수록 의미가 있다. “스리랑카의 코끼리 고아원에서 배출되는 똥으로 현지의 전통 제지기술로 만든 친환경 종이다. 코끼리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 주체로 참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본래 자연과 인간은 평등한 관계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종이 생산을 위해 나무를 덜 베도 되고 동물 똥을 자원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코끼리똥종이는 업사이클링의 좋은 사례로 꼽힌다.
일본인 기업가 히사시 우에다 대표가 스리랑카 여행 중 아이디어를 얻어 2000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코끼리똥종이. 전 대표는 2008년 무렵 일본 출장길에 처음 발견한 이 종이에 반해 우에다 대표에게 줄기차게 이메일 보내고 일본으로 직접 날아가 ‘진심’을 보여준 덕분에 비즈니스 파트너가 됐다. 현재 시민청,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 중이며 수익금 일부는 스리랑카 코끼리 고아원을 돕는데 쓰인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이후로 ‘모험으로 세상을 바꾸는’ 갖가지 소셜 비즈니스를 선보이고 있다.
전 대표는 소셜 비즈니스맨인 동시에 문화기획자, 지역 활성화 코디네이터, 소셜벤처들의 멘토, 번역 작가란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특유의 열정, 크리에이티브 DNA로 자가 성장해 나가는 그를 탐구해 보았다.
2014년 서울대공원 가을축제 때 코끼리똥종이 제작 체험 행사를 열었고 ‘액션 대공원’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했다. 소셜벤처들과 손잡고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로 대공원을 액티브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꾸자는 취지였다.
가령 숲에서 동물 먹이를 얻고 배설물은 퇴비로 활용하거나 똥종이 재료로 쓴다. 혹은 친환경 연료인 펠릿을 만들고 그 연료로 대공원 내 난방을 하면 ‘탄소 배출 제로’를 실천할 수 있는 거다. 숲에서 간벌한 나무로 사회적기업 소속 아티스트들이 대공원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대공원 하루 방문자는 30만 명이다. 걷기만 해도 기부가 되는 앱 ‘빅워크’와 연계해 방문객에게 자연스럽게 기부를 유도해 모금액은 동물 우리를 개선하거나 숲을 가꾸는 데 사용하며 ‘가치 사슬’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프로젝트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성된 북성로는 한때 대구 최대 공구거리였지만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뒤로 쇠락하고 슬럼화 됐다.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손잡고 북성로 재생에 힘을 쏟는 중이다. 이곳에는 역사성과 조형미를 갖춘 근대 건축물들이 꽤 많다. 이상화 고택, 자유당 대구본부가 있고 골목길도 1천 개나 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지닌 9개의 청년 소셜벤처들과 지역자원을 재구성한 특색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북성로를 창의적인 명소로 또한 생산-유통-소비가 이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적경제클러스터를 만들고 싶다. 절반쯤 목표를 이룬 듯싶다.
1974년생인 전 대표는 ‘하고 싶은 일 맘껏 하느라’ 1995년 입학 후 14년 만에 경북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괴짜다.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정’이 다이내믹한 삶의 원동력이다. 고교 시절,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보려고 비디오 가게에서 무급 알바를 자청할 만큼 시네마 키드로 자랐다. 고교 졸업 후에는 책 속에 나오는 ‘노동자 삶’이 궁금해 공장 노동자, 막노동 인부로 2년을 보낼 만큼 어린 시절부터 ‘똘끼 충만한 삶’을 살았다.
선배들과 경북대 학생복지관에서 전 세계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선보이는 비디오방 사업을 시작했는데 꽤 잘됐다. 우연히 대학 축제 때 심야영화제를 기획해 노천 잔디밭에서 <해피투게더>, <데드 얼라이브>, <킹덤> 영화를 틀었는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축제가 억수로 재밌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맛봤다.
내친김에 예산 한 푼 없이 캠퍼스에서 ‘우이독경’ 축제를 열었는데 대박이 났다. 이러면서 ‘기획’의 세계에 눈을 떴다. 그 뒤에는 지하철 역사에서 공연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200페이지 분량의 기획서를 꼬박 두 달간 준비해 대구지하철공사 공무원들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100여 개 팀이 참가한 ‘I love 지하철 문화기행’을 성사시켰다. 그 후 록 페스티벌까지 열며 뮤지션들과 친해졌다.
인디 밴드 세계에 들어가 보니 다들 로망이 앨범을 내는 거더라. 그래서 겁 없이 레코드 스튜디오를 차렸다. 하지만 빚만 지고 망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 전까지 ‘비영리 추구’하며 하고 싶은 것 맘껏 할 때는 행복했는데 ‘영리 추가’가 목적이 되자 내 몸에 맞지 않은 옷 입은 것처럼 거북했다. 망해 보니 영리 비즈니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부터는 ‘비영리’가 내 삶의 좌표가 됐다.
참신한 패션쇼 기획으로 주목받았고 시민 런닝맨 개념을 처음 도입한 도심 RPG 같은 전충훈표 히트작들도 꽤 많이 선보였다.
지금까지 두 번의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야심 차게 시작한 레코드 스튜디오가 망했을 때 펑펑 울만큼 힘들었다. 그 뒤 잘 나가는 기획자로 승승장구하다 직(職)에서 물러나 야인이 되자 싸늘하게 변하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도 받았다. 허나 그 과정을 견디면서 단단하게 성장했고 겸손해졌다.
예전에는 스태프들을 달달 볶았는데 가만 보니 나만 ‘빙신’이 되더라. ‘리더는 직원에게 권한을 주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마인드를 갖게 된 뒤부터 일하기 수월해졌다.
2009년부터 소셜벤처 세계에 입문했다. 소셜벤처 경연대회 총괄, 코칭 역할을 맡으며 아이디어, 끼가 넘치는 청년들과 많이 만난다. 요즘 잘 나가는 엔터테인먼트 소셜 벤처 ‘메이커스’, 국악공연 그룹 ‘나릿’과도 멘토-멘티로 만났다.
당시에 ‘업의 본질이 무엇이냐?’, ‘사업놀이 하지 마라. 거창하게 공익 위한다고 폼 잡지 말라.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이냐?’란 질문을 그들에게 끝없이 던졌고 나름의 답을 찾은 덕분에 지금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한 거다. 이처럼 본질을 알고 현실적인 비즈니스 모델 갖추는 건 중요하다. 비영리를 지향하는 나 역시 늘 화두로 삼고 있다.
네트워크로 촘촘히 엮인 동행숲은 혁신적인 모델이다. ‘깃발 세운 뒤 이리 모여라’식으로 조직과 형식 갖추지 않는 게 장점이다. 지금처럼 각자의 일 열심히 하며 프로젝트별로 협업이 필요한 사람들끼리 연대하면 된다. 캐주얼한 관계가 좋다. 다만 서로 의존하려 해서는 안 되고 각자가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협업을 통해 성장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전 대표의 ‘크리에이티브 뿌리’가 궁금했다. 그는 ‘영화, 음악, 책’이며 특히 영화에서 기획의 모든 걸 배웠노라고 말한다. “일본 영화 보며 일어 독학으로 깨우쳤고 인디 밴드 해외로 진출시키면서 일본 인맥의 물꼬를 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일본 출장길에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 온다”는 말도 덧붙인다.
점을 선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는 ‘전충훈 식 뚝심’과 크리에이터답게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점을 새롭게 조합해 재배열하는 그의 분투기가 인터뷰 내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