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 동물보호 두 마리 토끼 잡는 열정인
김이삭 헬로우뮤지움 관장은 국내 1호 뮤지엄 에듀케이터다.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개관,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어린이프로그램, 전쟁기념관 특별 전시,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건립계획 진행과 헬로우뮤지움(www.hellomuseum.com) 운영까지 '어린이 예술교육'이란 분명한 이정표를 향해 쉼 없이 직진하는 그가 전부터 궁금했다. 때문에 내가 만나고 싶은 위시리스트 속 한 사람이었는데 ‘동행숲’ 인연 덕분에 만남이 성사됐다.
2007년 강남구 역삼동에 첫 선을 보인 '헬로우뮤지움'은 2015년 성동구 금호동으로 이전하면서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이란 친근한 꼬리표까지 붙었다.
빼곡한 아파트숲에 자리 잡은 헬로 뮤지 움. 미술작품을 수동적으로 ‘관람’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하면서 어릴 때부터 예술이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하자는 예술교육 철학을 담아 공들여 만들었다.
어린이 맞춤형 공간으로 꾸미려 애쓴 세심한 고민의 결과물을 미술관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작품들은 아이들 시선에 맞춰 야트막하게 걸었고 옥상도 체험 공간으로 살뜰하게 꾸몄다.
사방 벽면에다 아이들은 맘껏 그림 그리고 낙서하며 속내를 발산한다. 한켠에 마련된 옥상 텃밭에는 푸릇푸릇 상추가 자라고 있다. 씨앗 심어 싹 틔우고 물 주어 가꾸면서 도시 아이들이 ‘생명’을 키워볼 수 있는 요긴한 공간이다.
예술 교육 토양이 허약한 대한민국에서 헬로우뮤지움은 비영리법인 어린이 전문 미술관으로 10년을 꿋꿋하게 버티며 직진 중이다. 뿐만 아니라 동참하는 아티스트, 기획자들이 계속 늘면서 발랄한 콘텐츠 창작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성동구 기반 예술 활동의 허브 공간으로 일궈나가는 중이다. 그 중심에 김 관장이 있다.
고운 미소, 상냥한 말투의 그는 포근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터프한 행동가 김이삭이 그 안에 공존한다.
Q. 동양화를 전공했는데 화가 대신 기획자의 길을 택했네요.
“예고 시절엔 오로지 그림만 그렸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까 되려 창작열이 식더군요. 책 읽기 좋아하고 사람과의 소통 즐기는 내가 그림 말고 무엇을 하면 좋을까 찾아다녔지요.”
잡지사, 삼성문화재단에서 인턴을 하며 현장 활동가의 면모를 십분 발휘한 그는 유학길에 올랐다. 우연히 미국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다 운명처럼 뮤지엄 에듀케이션 분야를 접한다. 덕분에 평생 할 일을 찾았고 지금까지 모든 에너지 쏟으며 매진 중이다.
Q. 뮤지엄 에듀케이터는 무슨 일을 하나요?
“큐레이터가 전시기획자라면 에듀케이터는 전시된 작품들을 어떻게 관람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파고들며 전시 콘텐츠를 만듭니다. 스태프들끼리 스터디와 치열한 토론, 외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이 꼭 필요합니다. 가령 표범을 테마로 전시를 연다면 작품 감상과 설명뿐 아니라 민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표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다큐 영상도 함께 보며 표범의 생김새, 습성, 멸종위기에 몰린 현주소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지요. 그런 다음 자유롭게 표범을 표현해 보라고 유도합니다. 꼬리가 또르르 말려있는 모습을 클로즈업해 그리거나 표범 패턴을 강조하는 등 아이들 각자의 머릿속에 담긴 표범들이 재치 있게 표현됩니다.”
<미술관 사파리>, <그림일기, 그림읽기>, <헬로우 묵지빠>, <문방사우>처럼 화제를 모았던 헬로 뮤지움의 전시 기획물은 아티스트, 큐레이터, 에듀케이터 간의 협업과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Q. 헬로 뮤지움이 금호동 시대를 열면서 더욱 바빠졌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모가 많이 사는 동네, 교육비 지출이 적은 곳, 등록된 미술관이 하나도 없는 곳이란 3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사할 곳을 물색하다 이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10년째 방치된 병원 건물로 동네의 흉물이었지요.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거리가 산뜻해졌다고 동네 분들이 좋아하시고 응원도 많이 해주세요. 성동구내 지역 아티스트, 독립서점, 어린이도서관과도 손잡고 북마켓, 기획 공유 프로젝트, 음악회 같은 이벤트를 수시로 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일대가 어린이 테마거리로 조성될 예정입니다. 우리가 꿈꾸던 ‘동네 미술관’ 답게 지역에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어 뿌듯합니다.”
Q. 아이들의 창의력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다양한 지적 자극받으며 살고 있는데 사고력의 깊이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습니다. 미술도구만 해도 색연필, 물감, 사인펜, 파스텔, 마카.... 전문가용 갖가지 화구를 유치원생 손에 쥐어주지요. 사실 한 가지 재료에 익숙해지려면 무한 반복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필, 흰 종이만으로도 아이들에게서 무궁무진한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어요. <문방사우> 전은 이런 고민에서 기획했습니다. 붓 하나로 1천 개의 색을 낼 수 있으며 다 쓰고 난 붓을 세척해 말린 다음 잘 보관하는 것까지도 작품 활동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성동구 내 유치원, 어린이집에 가서 진행하는 ‘찾아가는 미술관’ 역시 이 부분을 고민하며 프로그램을 기획합니다.”
Q. 모든 프로젝트마다 생명이란 묵직한 주제를 바탕에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 동물, 식물은 내 삶의 좌표입니다. 미술관 초창기 시절엔 우리 직원들에게 하도 생명존중, 동물보호를 강조하니까 다들 의아해하더군요(웃음). 지금은 다들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죠. 8년 전쯤 한 아이가 ‘햄스터가 고장 나서 마트에 가져다주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받았어요. 마트에서는 진짜로 동물이 아프면 바꿔준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더군요. 동물은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예술교육이 단지 미적 감수성을 넓히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작품 감상도 본인의 관점, 작가의 시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까지 포용하다 보면 세상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저절로 생명 교육이 되고 아이들 마음속에 따뜻한 세계관이 자리 잡게 됩니다.”
Q. 기획 전시, 예술교육 콘텐츠에 동물 보호의 가치를 어떻게 녹여내나요?
“멸종위기 동물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민화박물관에서 원화(原畫) 지원을 받아 진행한 한국 표범 프로젝트가 대표적이지요. 속담, 설화 속에 자주 등장할 만큼 우리 땅에 많이 살았던 표범이 어느새 사라졌고 지금은 범골, 범바위 같은 지명(地名)에서만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멸종된 한국 표범 사례 들려주며 아이들에게 이 땅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도 함께 어울려 사는 상생공간이라는 걸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진행한 <미술관 사파리> 기획전은 보람과 아픔을 동시에 안겨줬습니다. 작가들 작품에 사진, 인터랙티브 미디어까지 활용해 동물보호 콘셉트로 공간을 구성하고 관람객의 자발적인 후원까지 이끌어냈습니다. 인터넷 예매사이트 상위에 오를 만큼 반응이 뜨거웠지요. 그러다 보니 전시 이름 비슷하게 베껴 동물 데려다 관람객이 만져보게 하는 등 동물보호 철학은 빠진 채 흥행에만 집착한 유사 전시들이 생겨나더군요. 상처가 컸어요. 2012년에는 아예 미술관사파리 전시 자체를 접었습니다.”
Q. 동물보호 활동에도 적극적이지요?
“나는 채식주의자지만 채식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육식을 하더라도 가축이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되며 소비자에게 유통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소신은 뚜렷합니다. 우리 미술관은 모피코트를 입으면 입장을 제한합니다. 동물 가죽 벗겨내는 비참한 제작 공정을 적나라하게 안다면 과연 모피코트를 입을 수 있을까요? 반달곰 학대를 고발하는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1400마리나 되는 반달곰을 농가에서 사육하고 있습니다. OECD 가입 이후 곰 고기 판매가 금지되자 사육농가가 고육지책으로 살아있는 반달곰의 배를 갈라 쓸개를 떼어내는 일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 갇힌 엄마 반달곰이 끔찍한 고통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눈물 흘리며 새끼를 죽이는 모습은 충격적입니다. 반달곰들이 지리산 반달곰처럼 토종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동물학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락사, 불임수술 같은 단기 처방부터 시작해 반달곰들의 서식지를 만들어 예술과 문화 콘텐츠와 결합시킨 관광자원화를 장기적으로 모색하면 좋겠는데 현재는 답보상태라 안타깝습니다.”
Q. 동행숲과의 연대를 어떻게 모색하고 있나요?
동행숲은 생명 존엄성, 동물복지란 좋은 취지로 다방면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서두르기보다는 충분히 공감대를 만들어 비전을 세우며 각자의 재능, 장점을 이끌어 내며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서로 교류하며 지적 자극을 주다 보면 분명 좋은 콘텐츠가 나올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동행숲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동안은 생명, 동물보호 같은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미술관이란 공간에서 예술이란 은유적 방법으로 풀어냈다면 동행숲에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우리 미술관이 동물보호의 베이스캠프가 됐으면 좋겠다는 꿈도 함께 꾸어봅니다.
인터뷰 마치고 미술관을 음미하듯 지하 전시실부터 옥상까지 다시 한번 둘러봤다.
아이들이 맘껏 구를 수 있는 미술관 마룻바닥, 3번 이상 쓰라고 재치 있는 문구가 담긴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종이컵, 동네 서점과 함께 골라 전시한 독립출판물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왔다.
가치로움을 공간에 세련되게 풀어낼 줄 아는 헬로우뮤지움만의 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대견한 문화공간을 일궈내고 생각한 대로 말한 대로 실천하며 가슴이 시키는 일에 온 에너지 쏟아부으며 꼬닥꼬닥 나아가는 김이삭은 참 멋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