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동물원 작가 인터뷰 4] 동물인형에 생명의 가치 불어넣다
정중동(靜中動). 백순하 동물인형 작가를 보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단어다. 예술동물원 기획회의에 수시로 참석해 고요하게 앉아 사람들 이야기 경청하며 아이디어를 숙성시켜 기획자의 관점, 작가의 시선을 작품 속에 골고루 녹여내는 그. 이런 성실함과 내공이 예술동물원아카데미와 선유도공원 작품 전시 그리고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남산둘레길축제에 참여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동물 없는 동물원이란 예술동물원의 콘셉트가 좋았어요.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 예술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와 닿았지요” 인형 만드는 재능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맘껏 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들이 신이 난다고 그는 말한다.
백 작가의 전직은 완구회사 인형 디자이너다. 40대 중반까지 ‘상업적 가치’가 있는 인형을 만들었던 그다. 인형 디자이너에서 동물 인형 작가로 변신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건 담비다.
미대생 조카의 제안으로 수제양말인형 아이템으로 홍대 프리마켓에 꾸준히 참여했던 그는 구하라 담비 파티와 인연이 닿았다. 노란 목도리를 한 귀염성 있는 담비 인형을 만든 걸 계기로 동물인형 작가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
“담비에 대한 자료 검색하고 대공원 가서 실제 살아 움직이는 담비의 이모저모를 관찰해 스케치한 후 도안 작업을 거쳐 인형으로 완성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멸종위기 동물 보호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내가 만든 인형에 담을 수 있다는 게 내 가슴을 뛰게 했지요.”
상업적 가치가 우선이라 잘 팔릴 인형만 골라 만들어야 했던 디자이너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표현하고 싶을 대로 맘껏 만들 수 있다는 게 신났어요. 물론 힘은 들지요. 디자이너였을 때는 팀별로 분업화돼 있어 제품 기획과 도안만 하면 됐는데 인형 작가란 타이틀을 단 뒤로 처음부터 최종 완성까지 오롯이 책임져야 해요. 처음에는 재단, 봉제 작업이 능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재미있으니까 계속 만들었고 여기까지 왔네요.”
담비를 시작으로 코뿔소, 산양, 솔부엉이, 반달가슴곰, 표범... 멸종위기 동물을 테마로 인형 가족들은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늦둥이 둘째 딸이 엄마 작업에 관심이 많아요. 동물 스케치하러 동물원에 동행하고 인형 만드는 과정 지켜보며 의견도 내지요. 지난해 여의도에서 열린 한강 Zoo 전시를 보고 오더니 ‘흰코뿔소’란 동시를 짓더군요. 초등학생 시선에서 코뿔소 뿔을 얻으려는 인간 욕심 때문에 죽어가는 동물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글이지요. 엄마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일상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스스로 배워나가는 딸을 보며 ‘내가 하는 작업이 가치 있구나’ 무언의 격려를 받았어요.”
지난 9월 선유도공원 예술동물원 전시에서 백 작가의 인형 작품들은 관람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담비 결혼식을 축하하로 모인 숲 속 동물 가족들의 모습을 표현한 ‘숲 속의 공존’. 신랑 신부 담비, 주례 담비, 표범 가족, 솔부엉이들, 산양 커플 등 한 땀 한 땀 애정 담아 만든 20여 마리 동물들에게서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공존’의 메시지가 읽힌다.
“맘껏 상상해 내 손끝으로 구현할 수 있어 작업 내내 행복했어요. 인형 소재를 확장해 보는 실험도 시도했지요. 숲 속 풍경은 3D 그래픽을 활용해 인쇄하고 인형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보려고 3D 프린팅 기술까지 배워 인형의 눈 , 코, 입, 발톱 모형대로 출력해 정교하게 색을 입혔지요. 에피소드도 많아요. 커다란 표범의 야성을 보여주고 싶은데 눈빛이 너무 착해 보여 여러 번 재작업을 했고 마음에 쏙 드는 천을 구하러 동대문 원단시장을 샅샅이 훑었지요.”
공들여 준비한 전시였던 만큼 보람도 컸다. 선유도공원 전시장을 찾은 어린이집 단체 관람객들에게는 멸종위기 동물 인형을 가지고 생명의 소중함, 서식지 보존의 가치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백 작가가 직접 설명했다. 생명이란 추상 개념을 친근한 동물 인형으로 풀어내니 아이들은 쉽게 이해했다.
스토리와 메시지가 담긴 인형을 만든다는 게 신납니다. 제작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하는 인형디자이너 시절에는 맛보지 못했던 창작의 자유를 느껴요. 3D 그래픽, 3D 프린팅 기술을 접목시켜 표현 영역을 계속 확장해 나가는 에너지도 이런 재미와 보람 때문이지요.
여러 장르의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라 반가웠어요. 서식지 보전, 멸종위기 동물 보호란 동일한 테마를 가지고 작가들마다 각기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걸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의미 있었습니다. 여러 아이디어도 얻었지요. 반면 서울시와의 첫 협치 프로젝트라 수십 명의 작가들과 기획자들 간의 소통이 미흡하거나 진행 과정에서 흠결은 있었습니다. 허나 서로 머리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올해 진행 프로젝트의 공과에 대해 의견 모으고 서로 격려하면 내년에는 훨씬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요.
예술동물원과의 인연으로 ‘멸종위기 동물 인형 작가’란 나침반을 발견하고 힘껏 도약할 준비를 하는 백 작가는 요즘 하루하루 분주하지만 생동감 넘친다. “공들여 만든 동물인형에 스토리를 입히고 생명의 소중함이란 묵직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매력적이지요. 내 능력껏, 내 소신대로, 내 속도에 맞춰 직진하려 합니다.”
글, 사진 _ 오미정 (스토리라이터)
작품 _ 백순하 작가 (blog.naver.com/socksndo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