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연말에 '대토론회'라는 행사를 한다. 이 행사의 목적은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 사회 인사 등 학교를 둘러싼 구성원들과 소통하며 한 해의 교육 활동을 반성하고 학교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과연 소통과 발전을 위한 행사일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학생이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제한할 것인가?' 라는 안건으로 토론을 했는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토론이 흘러갔다. 토론 주제가 학생이 아닌 어른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기에 머리 굵은 학생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스마트폰이 학습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부모, 자신의 성적 향상을 위해 외부적인 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학생, 전통적인 학습 방법을 고수하는 많은 교사 등 스마트폰 사용을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진영은 학생 인권을 내세워 스마트폰 사용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진영에 비해 목소리가 더 컸다. 결국, 의도된 결론을 향해 진행된 토론은 '스마트폰은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제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민주사회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이런 의사결정 과정을 경험하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토론회는 민주적 합의를 가장하여 학생들에게 족쇄를 채웠다. 학생들의 의사에는 처음부터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정해진 각본에 의해 진행된 '대토론회'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상대의 의견에 관심 없이 진행된 토론회에서 불통의 아이콘 천지(天地) 비(否) 괘가 보인다.
䷋
천지 비
천지(天地) 비(否), 막힘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화가 잘 안 될 때가 있다.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대화를 해도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학생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하고, 아이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학교는 더 이상 배움의 공간이 아니다. 직장 생활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의 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하직원은 직장 상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오히려 적이 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여 막히게(否) 되면 반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비(䷋) 괘에 대해 <서괘전>은 “하늘이 위에 처하고 땅이 아래 처하면 이는 천지가 가로막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비(막힘, 否)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은 위로 향하는 물건이고 땅은 아래로 향하는 물건인데,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나서 만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앞(11)에서 지천 태(䷊)가 소통, 순환, 어우러짐, 역지사지를 의미했다면, 하늘(☰)과 땅(☷)의 위치가 정반대인 천지 비(䷋, 否) 괘는 불통, 막힘, 반목, 고집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공기층의 불통, 대기오염
상하의 불통은 지리적 공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대기의 대류권에서는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해발고도가 100m 상승할 때 기온은 약 0.5~1 ℃ 낮아지기 때문에 아래층의 공기(☷)가 위층의 공기(☰)보다 온도가 높다. 이 때문에 대류 현상이 원활하게 일어나니 오염물질이 쌓이지 않아 사람들이 쾌적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날씨가 맑은 날 지표면의 급격히 열손실이 일어나거나, 분지 지역의 산 사면에서 냉각된 찬 공기가 분지의 낮은 곳으로 이동해 쌓이면서 아래층 공기(☷)의 온도가 위층 공기(☰) 보다 낮아질 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기온 역전층이 발생하면 지표면에서부터 역전층이 나타나는 고도까지 대기가 안정화(䷋)되어 대류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염물질이 지표면에 쌓여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가을이나 겨울철 바람이 없는 맑은 날 새벽 기온역전 현상으로 인해 대기가 정체되어 안개가 발생하는 날이 많은데, 대기가 안정화되어 오염물질이 바깥공기와 통하지 못해 대기 오염이 심해진다.
출처: 환경부 공식 블로그 '환경부와 친해지구'
대기 안정으로 인해 오염물질이 쌓인 도시(출처: 한국 수자원공사)
대기의 불통으로 인해 나타난 피해 중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것은 런던 스모그 사건이었다. '런던 스모그'는 1952년 12월 5일부터 9일 사이 약 5일 간 발생하였는데, 추운 날씨로 가정에서는 평소보다 석탄 난방을 더 많이 했고, 공장들은 굴뚝으로 대기 오염물질을 그대로 방출하였다. 이 시기 런던의 지상 교통은 전차에서 디젤버스로 전환되었다. 아황산가스, 이산화황 등의 대기오염물질이 방출되면서 노약자들을 중심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여 피해자가 약 12,000명에 달했다.
소통은 자유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체하면 안 먹느니만 못하다. 아무리 발달한 도시도 바깥과 공기가 통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정치 시스템이라도 소통이 안되면 독재로 변하고, 가족 구성원의 대화가 단절되면 그 가정은 화목할 수 없다. 소통은 순환이고 생명이고 자유이다. 불통은 순환, 생명, 자유를 억압한다.
지금 나는 무엇에 막혀 있을까? 내가 대하는 학생들에게 꽉 막힌 교사로 살고 있지는 않나 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