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 아래 동서는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에서 일하는데,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커다란 곰과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다. 주말이나 추석과 같은 연휴에 지역구의 독거노인들을 돌보느라 온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안부 전화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절로 생긴다. 낮에는 복지관의 과장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등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모자라게 열정을 다해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을 낮추며 드러내지 않으니 몸에 겸손이라는 덕목이 붙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런 동서 덕분에 우리 가족은 봉평에 여행할 일이 많아졌다. 동서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인데, 동서네와 함께 여행할 일이 생기면 동서의 고향집에 들러 사돈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그 일대의 숨은 맛집, 여행지를 즐긴다. 정주간이 있는 겹집, 하늘 아래 첫 물을 받아 만든 수돗가 안에 살고 있는 도롱뇽, 집을 둘러싼 사과나무, 널다란 배추밭 등 고향집만으로도 볼 것이 많은데, 몇 발자국만 가면 다양한 경관들을 볼 수 있어 별천지가 아닐 수 없다.
10여 년 전에 모의고사를 출제하러 강원도에 와 멀리 봉평의 태기산 풍력발전소를 보고 한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동서가 태기산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 드디어 답사를 할 수 있었다. 봉평에 위치한 보광 휘닉스 파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주변 산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그 전망대에서는 태기산의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전망대 주변 완만한 평탄면에는 아이들이 양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체험공간들이 있고, 멀리는 태기산 산줄기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풍력 발전소의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전망대에 서 있으면 이 곳의 지명이 평창(平昌, '평평하고 아름다운')군 봉평(蓬坪, '쑥 펼쳐진 벌판') 면인 이유가 쉽게 이해가 된다. 봉우리가 완만한 산지들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어 '평평할 평(平) 자'를 지명에 쓸 수밖에 없다. 해발 700m 고지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들과 행복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HAPPY 700'이라는 평창의 선전 구호가 잘 어울린다.
태백산맥의 대관령 일대에는 기복이 작고 경사가 완만한 평탄면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지형을 고위평탄면이라고 한다. '고위평탄면'은 '위치가 높고 평탄한 지표면'이라는 뜻이다. 고위평탄면은 산(☶) 위에 널따란 벌판(☷)이 나타나는 모양이니, 이는 지산(地山) 겸(謙)의 상이다.
䷎
지산 겸
산 정상부가 평탄한 고위평탄면에는 양떼목장, 풍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지산(地山) 겸(謙), 인격과 소양을 갖춘 자가 낮춘다.
겸(謙) 괘는 <주역전의>에 "땅(☷)의 체(體)는 낮고 낮으며(卑下), 산(☶)은 높고 큰데(高大), 산이 땅의 아래에 있음은 겸(䷎, 謙)의 상(象)이요, 숭고한 덕으로 낮은 곳의 아래에 처함은 겸(謙)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하늘 아래 산보다 높은 것이 없지만 그 산이 땅 아래에 처해 있으니 겸손함을 나타낸다.
<서경>에서는 “자만한 자는 손해를 자처하고 겸손한 자는 이익을 받으니, 이는 하늘의 도리이다”라고 하였고, <도덕경>에서는"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은 그것이 아래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겸손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겸손할 겸(출처:<설문해자>)
겸(謙) 자는言(말씀 언)과 兼(겸할 겸)을 결합하여 만들어졌는데, 兼자는 여러 개의 벼 다발을 손에 쥐어 아우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일을 두루 아우르고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데 말씀 언(言) 자를 결합해 ‘말에 인격과 소양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라는 의미로 '겸손하다.'의 뜻을 갖게 되었다.
높일 것도 없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보다 더한 꼴불견이 없다. 살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상태로 죽는 게 인간이기에,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인간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치인의 기준 만들기
연일 뉴스에는 미국, 일본, 우리나라 할 것 없이 스스로 높이는 이들이 정치 리더를 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언론 플레이로 가짜 뉴스를 배포하고, 자신의 행위를 부풀리는 폭력적이고 비열한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가 민주적 선거 절차가 확립되어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민주적으로 살 수 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므로 항상 현재 진행으로 발전해야 한다.
나는 민주적 사회로 이끌 리더들을 뽑기 위한 기준에 '누가 더 겸손한가'라는 질문지를 하나 더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추어 스스로 감추어도 산처럼 드러나며, 낮은 곳에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표 한 장을 줄 마음이 있다.
한걸음 더 지리 속으로: 높고 평탄한 땅, 고위평탄면
태백산맥의 대관령 일대에는 기복이 작고 경사가 완만한 평탄면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지형을 고위평탄면이라고 한다. 신생대 제3기 경동성 요곡 운동 전의 한반도는 오래도록 깎여 평탄한 땅이었는데, 이 지각 운동으로 지반이 융기하여 한반도 전역이 융기하였고,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고원은 골짜기와 산지로 변했고, 해발고도가 높은 평탄면은 대부분 해체되었다. 그런데 기반암의 강도의 차이, 침식의 속도의 차이 등 다양한 원인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곳의 평탄면이 아직까지 남아 산 정상부가 평탄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고위평탄면'이다. 고위평탄면은 신생대 중기 이전의 평탄면을 나타내는 '화석 지형'이라 할 수 있다.
고위 평탄면은 해발고도가 높아 연평균 기온이 낮지만 산지가 많아 연 강수량은 많은 편이다. 특히, 건조한 봄철에도 눈이 녹으면서 토양에 수분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은 목초 재배에 유리하여 삼양 목장, 양 떼 목장 등 목축업을 하기에 유리하다. 여름철 서늘한 기후를 이용하여 감자, 배추, 당근 등의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