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25. 천뢰(天雷) 무망(无妄): 천명에따라 살기

by 땅 작가

빅토리아 엘리스 Ⅲ세

내가 근무하고 있는 교무실에는 허술한 플리스틱 컵에 담긴 선인장 하나가 있다. 전임자가 놓고 간 것인데 나와 처음 만난 것은 2월 중순 즈음이다. 긴 겨울방학 동안 추위와 목마름에 시달렸는지 쓰레기통에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혹시나 살릴 수 있을까 하여 먹다 남은 생수를 부어주었는데, 며칠 지나니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색깔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에는 기껏해야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하던 것이 두어 달이 지난 지금에는 온전한 엄지손가락만하게 자랐다. 옆구리에서는 새순이 세 군데서 뻗어 나와 하늘을 보고 팔을 벌린 모양이 앙증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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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에 '빅토리아 앨리스 Ⅲ세'라고 적혀 있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선인장의 종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런 종은 없었다. 그러면 이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추정컨대 전임자 선생님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빅토리아 사막과 앨리스 사막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은 나와 같은 지리 선생님이었고, 매우 유머러스한 분이었기 때문에 선인장에 특별한 이름을 찾아 붙이고도 남을 분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사막으로 선인장에 이름을 붙인 선생님의 재치와 유머가 느껴진다.

나는 빅토리아 엘리스Ⅲ세를 위해 교무실에서 가장 햇빛이 풍부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햇빛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느새 창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볕도 잘 들지 않는 교무실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즐기고 있는 '빅토리아 앨리스 Ⅲ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에 충실하게 사는 듯 보였다. 빅토리아 앨리스 Ⅲ세가 자신이 가진 본성을 펼치는 모양이 천뢰 무망(无妄) 괘를 연상케 한다.

䷘ 천뢰 무망

천뢰 무망괘에 대해 <주역전의>에서는 '괘 됨이 건(乾)이 위에 있고 진(震)이 아래에 있다. 진(震)은 동함이니, 동하기를 천도(天道)로써 하면 무망(无妄)이 되고 동하기를 인욕(人慾)으로 하면 망(妄)이 되니, 무망(无妄)의 뜻이 크다.'라고 하였다. 주어진 분수대로 살지 않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것이 망령된 삶이다. 반대로 주어진 본성대로 살며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마음 속에서 망령된 생각이 발붙일 틈이 없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무망이라 한다. 하늘이 준 선인장의 본성대로 최선을 다하여 후회없이 사는 빅토리아의 모습에서 '천뢰 무망'의 상이 떠오른다.


건조 지역의 우레소리

천뢰 무망 괘는 하늘을 뜻하는 건(乾, ☰) 괘, 우레를 뜻하는 뢰(雷, ☳) 괘로 구성되어 있다. 뜻을 조합해 보면 이는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퍼짐'이 된다. 건(乾, ☰)은 건조함의 뜻이 있으니 조금 더 의미를 확장시켜 본다면 '건조한 지역에 우레 소리가 울려퍼짐', '건조한 지역에 비가 곧 올 징조'로도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을 사막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곳은 아니다.(실제로 강수량이 가장 적은 곳은 극 지역이다. 연 강수량이 20~30mm밖에 되지 않는다.) 쾨펜의 기후구분에 의하면 사막은 연 강수량 250mm미만인 곳을 이르는데,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아예 생명체가 없는 죽음의 땅은 아니다. 가끔 내리는 비와 안개는 선인장과 같은 식물을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이에 의존하는 생태계가 나타난다. '빅토리아 앨리스 Ⅲ세'와 같은 선인장의 원산지는 아메리카의 건조 지역인데 , 이 선인장에 의존해서 딱따구리, 라마, 뱀, 도마뱀, 각종 곤충들이 살아간다. 아무리 건조한 사막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기에 다양한 생명체들은 자신의 본성을 펼쳐가며 살아가고 있다.

lightning-216659_1280.jpg 사막에서 번개가 치고 있다. 곧 폭풍우가 몰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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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앨리스 3세와 같은 종인 귀면각 선인장과 선인장에 둥지를 틀고 있는 딱따구리


천명을 따라야 망령됨이 없다.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 이르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 이른다."

<중용>에 의하면 하늘이 만물에게 명령한 것이 성(性)이다. 그 부여받은 성(性)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빗물이 강을 만들어 바다로 흘러감은 물이 그 본성을 따르기 때문이며, 나무가 땅에 머리를 박고 물구나무로 사는 것은 나무가 그 본성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만물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성실히 따라 살아가기에 만물이 가득 찬 세상은 그 자체로 선악시비를 따질 수 없는 도(道)의 세계이다. 세상에 도(道) 아닌 것이 없으며, 도 없는 세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도리가 이와 같다면 사람도 하늘이 부여한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사람의 길(道)이며, 사람이 갈 길을 잘 닦아주는 것이 교(敎)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탐욕으로 물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명을 들으려니 잘 들리지 않는다. 오늘 아침 내가 먹는 음식은 천명대로 살다 간 곡식과 짐승이 아니고, 오늘 내가 마신 커피는 자본에 착취당한 이가 눈물 흘리며 딴 열매일텐데 나 혼자 천명대로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천명대로 살려다보니 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이웃들과 무망한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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